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가 "ADHD가 AI 시대에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그게 내 얘기인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8년 동안 늘 창을 여러 개 띄워 놓고 일했다.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늘 헷갈렸다.

IDE 다섯 개와 터미널 다섯 개가 한 모니터에 빽빽하다. 다른 모니터엔 광고 매니저, 대시보드, 노트가 떠 있다. 창 하나에 5초쯤 머물고 다음 창으로 넘어간다. 창만 많은 것도 아니다. 클로드 코드 하나를 띄우고 끝나길 기다리지 않는다. 한 작업 안에서도 서브에이전트 여럿을 한꺼번에 던진다. 그러면 한 화면에서 다섯 명, 열 명이 각자 다른 일을 한다.

다섯 IDE와 다섯 터미널이 동시에 떠 있는 듀얼 모니터 풍경

근데 마음 한쪽엔 늘 의심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한 가지를 깊이 파는 것 같은데 나는 다섯 트랙을 얕게 동시에 끌고 가는 것 같았다. 이게 일이 잘 굴러가는 건가, 그냥 한 가지에 못 머무는 건가. 해마다 한 번은 다짐했다. 한 번에 한 가지만 하자. 한 시간만 한 화면에 붙어 있자. 다짐은 늘 오전에 했고 오후 두 시쯤 깨졌다. 세게 다짐할수록 더 빨리 깨졌다.

그러고 나면 정신을 못 차렸다고 또 자책했다. 그렇게 8년이 갔다. 결과가 안 나온 건 아니다. 광고도 돌았고 코드도 짰고 데이터도 봤다. 그래도 한 가지에 깊이 빠지는 동료를 보면 내 집중력이 유독 약한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밤이었다.

페이스북에서 본 글

박태영 대표의 글이었다.

평소 눈여겨보는 분이다. AI를 포함해 산업 전반을 읽는 시각이 날카롭다. 피드에 이분 글이 뜨면 멈춰서 읽는다. 다음에 올 흐름을 먼저 잡는 감각이 있어서 팔로우해 뒀다.

그날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ADHD를 가진 사람 머릿속에는 다양한 컨텍스트가 동시에 흐른다.

박태영, 2026-04-21

스크롤이 멈췄다.

다음 문장은 이게 단점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보통 업무 상황에서는 zone out 하거나 동시성 메모리 충돌이 생긴다고. 거기까지 읽고 "그래, 이거 내 얘기네" 싶었다. 근데 그다음 줄이 묘했다.

"하지만 머릿속에 다양한 컨텍스트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기 조종이나 경영과 같은 고강도 병렬작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현재 AI 작업은 설계에 따라 고강도 비동기 병렬 작업으로 진행할 수 있고 그렇게 했을 때 기존 업무 생산성을 최소 수십 배 높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ADHD는 AI와 상성이 아주 잘 맞는다." (박태영)

전투기 조종. 경영. AI 작업.

셋 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다뤄야 하는 일이다. 거기서 ADHD가 강점이 된다고? 8년 동안 내가 "고쳐야 한다"고 다짐해 온 그게?

한참 폰만 보고 있었다. 내가 산만한 게 아니라 산만하다는 평가를 받는 환경에 있었던 거 아닌가. 8년 동안 내린 자기 진단이 통째로 뒤집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근데 의심도 같이 들었다. ADHD를 강점으로 포장하려는 자기변호 아닌가. 산만한 사람들이 위안 삼으려고 지어낸 이야기 아닌가. 박태영 대표 글이 좋아서 끌리는 건지, 듣고 싶던 말이라 끌리는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그래서 박태영 대표 글의 출발점이 된 발언부터 찾아봤다. 알렉스 카프의 말이었다.

알렉스 카프와 팔란티어

글이 좋다고 고개만 끄덕이고 끝낼 수도 있었다. 그래도 카프가 실제로 뭐라고 했는지는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알렉스 카프는 팔란티어(Palantir)의 CEO다.

팔란티어는 미국 국방부와 CIA를 비롯한 미국 정보기관에 데이터 분석 시스템을 파는 회사다. 빈 라덴 추적 작전, 우크라이나 전선의 표적 식별, 미국 보건복지부의 코로나 데이터 통합이 이 회사가 해 온 일이다. 의사결정 속도가 그대로 결과로 이어지는 환경이다. 흔한 실리콘밸리 SaaS 회사와는 결이 다르다.

카프는 "ADHD/ASD 같은 신경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이 AI 시대에 경쟁력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박태영 대표 글을 거쳐 전해 들은 말이라 카프가 어떤 맥락에서 했는지 100% 단정하긴 어렵다. 그래도 무게는 분명했다. 속도가 곧 생존인 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내린 진단이다.

인상적이었던 건 듣기 좋은 다양성 담론과 거리가 멀었다는 점이다. "포용하자"가 아니라 "이런 뇌가 결과를 낸다"는 진단이다. 카프한테 신경다양성을 인정하는 건 도덕보다 채용 전략에 가깝다.

알렉스 카프 저서 The Technological Republic 표지
Alexander C. Karp · The Technological Republic (2025)

박태영 대표도 이 대목에 끌렸다고 적었다. AI 작업이 "고강도 비동기 병렬"이라는 자기 관찰과 카프의 발언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는 거다. 한 사람은 한국에서 직접 AI로 일해 본 사람이고, 한 사람은 미국에서 그런 사람들을 대규모로 뽑아 쓰는 회사의 CEO다. 출발이 다른데 같은 결론에 닿은 게 흥미로웠다.

그때부터 진짜 궁금해졌다. 이게 정말 시대가 바뀌는 신호라면 먼저 알아본 사람이 더 있지 않을까. AI가 나오기 전부터 산업화 시대가 ADHD에 비정상 딱지를 붙인 게 부당하다고 본 사람 말이다. 검색해 보니 한 이름이 계속 떴다.

사냥꾼과 농부

Thom Hartmann.

Thom Hartmann. 미국의 정신치료사이자 작가다. 1993년에 Attention Deficit Disorder: A Different Perception이라는 책을 냈고, 거기서 "사냥꾼-농부 가설(Hunter vs Farmer Hypothesis)"을 처음 내놨다. 출발점은 아들이 ADHD 진단을 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임상 의사들이 아이를 "결함 있는 뇌"로 다루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틀을 찾기 시작했다.

Thom Hartmann 저서 ADHD: A Hunter in a Farmer's World 표지
Thom Hartmann · ADHD: A Hunter in a Farmer's World

가설은 이렇다. 인류는 진화사 대부분을 사냥과 채집으로 보냈다. 수십만 년이다. 농경 사회로 정착한 건 약 1만 년 전이고, 산업화 이후의 사무직은 200년도 안 됐다. 우리 뇌가 훨씬 오래 맞춰져 온 환경은 사냥터 쪽이다.

사냥꾼한테 필요한 건 한 가지에 한 시간 집중하는 힘이 아니다. 주변 자극을 한꺼번에 감지하는 능력, 빠른 맥락 전환, 위험 신호에 즉각 반응하는 힘, 새 자극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슴 발자국을 따라가다 옆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면 바로 그쪽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늦으면 죽는다.

농부는 반대다. 같은 밭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방식으로 맨다. 멀리서 새가 울든 말든 신경 끄고 하던 일을 한다. 한 계절을 작물 하나에 쏟는다. 농부한테 변화는 적이고 안정이 미덕이다.

핵심 주장은 이거다. ADHD로 진단받는 뇌의 특성은 사냥꾼 환경에서 정상으로 작동하던 기능이 남은 것이다. 농경 시대로 넘어오면서 인류 대부분은 농부 뇌로 적응했다. 그런데 일부는 아직 사냥꾼 뇌를 갖고 있다. 이 사람들이 농부의 환경에 들어가면 적응을 못 한다. 거기 붙은 이름이 ADHD다. 뇌가 이상한 게 아니라 자기 서식지가 아닌 곳에 와 있는 거다.

이 가설은 학계에서 제대로 검증된 적이 없다. 그걸 제일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이 Hartmann 본인이다.

"It's not hard science, and was never intended to be." (Thom Hartmann)

엄밀한 과학이 아니고 그렇게 의도한 적도 없다고 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틀일 뿐이고 아들의 ADHD를 다르게 보려고 만든 거라고 직접 적었다. 나는 이 솔직함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갔다. 과학으로 포장하지 않았는데도 30년 넘게 이 모델이 안 사라졌다면 이유가 있을 거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8년 동안 설명이 안 되던 어색함이 처음으로 한마디로 잡혔다.

나는 농부의 사무실에 들어간 사냥꾼이었다.

사냥꾼과 농부의 능력·시간 단위 비교 다이어그램

회의실은 농부의 공간이었다

이 틀로 보니 회사에서 답답했던 장면들이 다르게 보였다.

한 시간짜리 회의. 안건 하나, 자리 하나, 한 시간 집중. 농부의 공간이다. 사냥꾼한테 한 시간은 영원이다. 30분쯤 지나 머리가 딴 데로 흐르는 건 결함이 아니다. 한 자극에 오래 묶여 있으면 위험하다고 사냥꾼 뇌가 신호를 보내는 거다. 수십만 년을 그렇게 움직여서 살아남은 뇌다.

분기 단위 KPI 관리도 그렇다. 작물 하나를 한 분기 내내 같은 방식으로 키우는 농부의 시간표다. 사냥꾼은 하루 단위로 산다. 오늘 사슴 발자국이 보이면 사슴을 쫓고, 내일 멧돼지 흔적이 보이면 멧돼지를 쫓는다. 분기 초에 정한 작물을 끝까지 붙들고 있는 게 사냥꾼한텐 미덕이 아니다.

표준 프로세스 준수도 같다. 작년에 잘된 방식을 올해도 그대로 가져가는 건 농부가 제일 아끼는 미덕이다. 사냥꾼한텐 작년에 잘된 사냥터가 올해도 그대로라는 보장이 없다. 환경이 매일 바뀌니 매일 다시 판단한다.

8년 동안 해 온 "한 가지에 더 집중하자"는 다짐은 내 뇌한테 농부 뇌처럼 움직이라는 요구였다. 사냥꾼한테 농사를 지으라고 한 거다. 해낸다 해도 사냥꾼이 제일 못하는 일이다.

그렇게 보니 8년 치 자책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사냥꾼 뇌가 농부의 사무실 안에서 자기를 농부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거다. 그 잣대를 들이댄 것도 남이 아니라 나였다. 그래서 더 끈질겼다. 하나 덧붙이면, 그 8년 동안 결과는 냈다. 사냥꾼인데도 농부의 잣대로 평균 이상은 했다. 틀린 건 라벨이고, 내가 일을 못 한 건 아니었다.

AI가 만든 사냥터

그제야 IDE 다섯 개와 터미널 다섯 개가 떠 있는 내 모니터가 다르게 보였다.

AI 작업은 구조부터 사냥터와 닮았다. 클로드한테 일을 시키면 그 일은 내 손을 떠나 비동기로 굴러간다. 한 클로드가 5분 동안 일하는 사이 나는 다른 데를 본다. 그러다 보면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클로드를 띄우게 된다. 다섯 개가 동시에 따로 굴러간다. 어느 화면에 새 자극이 뜨면 그쪽을 보고, 처리하고, 다음 자극을 기다린다.

이게 사냥이다.

박태영 대표가 "고강도 비동기 병렬 작업"이라고 부른 게 이거였다. 농부 뇌에는 산만함으로 보이지만 사냥꾼 뇌에는 자연스럽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사냥꾼이 강점으로 작동하는 작업 환경이 나타났다.

8년간 회의실에서 딴생각하던 뇌한테 맞는 환경일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였다.

근데 사냥꾼은 책상에 묶여 있었다

신나서 클로드 다섯 개를 굴렸다. 터미널 다섯 개를 전부 바이패스 모드로 띄웠다. 승인 프롬프트가 거의 안 뜨고 웬만한 작업은 자동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런데도 첫 주에 다시 벽에 부딪혔다.

이번엔 회의실 탓이 아니었다. 내가 알림을 놓치는 게 문제였다.

승인이 자동이라고 다 자동은 아니다. 한 턴이 끝났거나, 자동 승인 범위를 벗어난 결정이 떴거나, 에러가 나면 신호는 결국 사람한테 와야 한다. 근데 3번 터미널에 새 신호가 떠도 내 눈은 1번에 가 있다. 30분이 지나도 모른다. 다섯 개 중 두세 개는 늘 어딘가에서 멈춘 채 나를 기다렸다. AI가 빠르면 뭐 하나. 작업 한 바퀴는 결국 내가 그 화면을 다시 볼 때까지 걸렸다.

처음엔 "또 내가 정신을 못 차려서"라고 생각했다. 근데 박태영, 카프, Hartmann을 차례로 거치고 나서 다시 보니 진단이 달랐다.

사냥터는 생겼다. 사슴 발자국 다섯 개가 사방에 흩어져 있다. 근데 사냥꾼이 제자리에서 못 움직이고 있는 거다. 발자국을 따라가려면 사냥꾼이 자유롭게 움직여야 한다. 책상 앞에 앉아 화면 다섯 개를 눈으로 돌아보는 건 사냥보다 농사에 가깝다.

문제는 내 뇌가 아니었다. 이번엔 자책할 일이 아니다. 환경 문제니까 환경을 바꿔서 풀면 된다.

도구는 충분히 싸졌다

산업화 시대엔 사무실을 회사가 설계했다. 책상 배치, 회의 길이, 출퇴근 시간까지 개인이 손댈 수 있는 건 없었다. 사냥꾼도 농부의 책상에 앉아야 했다.

지금은 다르다. Claude Code의 hooks는 settings.json에 한 줄만 넣으면 켜진다. 디스코드 봇 토큰은 무료로 5분이면 받는다. Node.js 스크립트는 GPT한테 시키면 30분 안에 나온다. 자기 신경형에 맞는 인프라를 직접 짤 도구가 이만큼 싸졌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내 작업환경을 바꿔야겠다.

근데 한 번에 다 바꿀 순 없었다. IDE 다섯 개, 터미널 다섯 개, 그 안의 서브에이전트 수십 개다. 사냥꾼 뇌에 맞는 풀 스택 환경을 처음부터 통째로 짜려고 들면 또 한 가지에 못 머물다 아무것도 못 끝낼 게 뻔했다. 그래서 제일 아픈 데 하나부터 손대기로 했다.

제일 아픈 데는 역시 알림이었다. 새 신호가 뜬 화면을 보고 있지 않으면 30분 동안 모른다. 그 30분 때문에 다섯 클로드의 진행 속도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이게 환경을 다시 짜는 첫 작업이 됐다.

1단계, 사냥꾼이 폰으로 신호를 받는다

제일 먼저 만든 건 단방향 알림이다. Claude Code의 훅(hooks)은 한 턴이 끝나거나, 승인이 필요하거나, 서브에이전트가 일을 마치는 순간을 잡는다. 그때마다 디스코드로 한 줄짜리 푸시를 쏘게 했다. 봇은 디스코드 AI 팀 만들 때 쓰던 춘식이를 그대로 써서 서버를 따로 띄우지 않았다.

함께 읽기클로드 채널 기능으로 디스코드에 AI 팀 만들기AI SYSTEMS · 2026.03.24

이것 하나로 책상을 떠나 있어도 다섯 클로드의 신호가 폰으로 왔다. 30분씩 멈춰 있던 일이 거의 없어졌다.

(디스코드 푸시를 붙이다 함정을 몇 개 밟았다. 그 얘기는 기술 회고 글로 따로 쓴다.)

2단계, 사냥꾼이 폰으로 지시도 던진다

며칠 써 보니 한계가 보였다. 받는 건 잘 받는다. 근데 밖에서 알림을 보다 "저거 한 줄만 고치면 되는데" 싶어도 손쓸 방법이 없다. 결국 집에 와서 노트북을 열어야 처리한다. 단방향이면 사람이 다시 책상에 묶인다.

그래서 반대 방향 길을 하나 더 깔았다. 폰에서 디스코드 DM을 보내면 프로젝트 인박스 파일에 쌓이고, 다음 클로드 세션이 그걸 컨텍스트로 읽는다. 예를 들어 폰에서 #blog 오탈자 3번 문단 고쳐줘 한 줄을 던져 두면 다음에 그 프로젝트에서 클로드를 띄울 때 그 지시부터 처리한다.

복잡한 큐 시스템이 아니다. 디스코드 봇 하나, Node 리스너 하나, 훅 하나. 이 작은 부품 세 개 덕분에 내가 어디 있든 데스크톱 작업은 계속 돈다.

며칠 굴려 보니 차이가 분명했다. 다섯 클로드의 가동률이 눈에 띄게 올랐다. 기분 탓이 아니다. 한 주에 처리한 작업 수가 두세 배가 됐다. 다섯 라인을 돌리는 데 내가 책상에 앉아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점심, 이동, 잠자는 시간을 빼면 거의 늘 다섯이 돌았다. 내가 책상을 떠나 있는 시간만큼 시스템이 더 일했다. 생각보다 훨씬 단순한 구조인데, 만들고 나니까 좋다.

폰과 데스크톱이 디스코드 인박스를 매개로 양방향으로 연결된 흐름도

두 단계를 진단부터 구현까지 어떻게 했는지는 마케터의 시스템 사고 사례로 따로 쓴다. 사냥꾼 뇌에 맞는 환경이 보이자 도구부터 만들게 됐다. 나한테 컸던 건 도구보다 8년 동안 의지로 풀려던 문제를 처음으로 환경 문제로 바꿔 본 순간이었다.

그래서 사냥꾼이 됐나

여기서 끝내면 깔끔하다. 근데 그러기 싫다.

박태영 대표 글엔 한 줄이 더 있었다. 이걸 빼면 얘기가 반쪽이다.

"ADHD + AI 조합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빈 조각이 있다. ADHD가 지휘하고 AI가 업무를 한다면 마지막으로 꼼꼼히 집착적으로 확인하고 딴지를 걸고 완결 짓는 사람이 필요하다." (박태영)

박태영 대표는 그 빈 조각을 ASD가 채운다고 했다. 디테일에 집착하고, 프로세스를 지키고, 검증하는 뇌다. 사냥꾼이 사슴을 잡아 오면 정말 먹어도 되는 사슴인지 살을 발라 확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가짜 사슴을 들고 온다.

지금 내 시스템엔 그 사람이 없다. 다섯 클로드가 그럴듯한 결과를 던지면 그냥 머지하고, 틀려도 모르고 넘어가는 일이 생긴다. 환경은 사냥터로 바꿨는데 사냥감을 검증하는 단계가 아직 빠져 있다.

그래서 다음에 만들 건 자동 검증 루프다. 코드를 바꾸면 테스트, 타입체크, 린트가 무조건 돌고, 콘텐츠를 바꾸면 사실관계 검증이 따로 돈다. 박태영 대표가 말한 "꼼꼼히 확인하고 딴지를 걸고 완결 짓는" 역할을 일단 사람 대신 자동화로 메워 보려는 거다. 그 역할은 원래 다른 신경형의 사람이 맡아야 제일 잘 돌아간다고 본다. 그래도 혼자 굴리는 시스템이면 흉내 낸 검증 파이프라인이라도 먼저 깔아 두는 게 없는 것보다 낫다.

근데 솔직히 이걸 쓰면서도 의심이 든다.

도구는 깔았다. 단방향 알림도, 양방향 브리지도 만들었고 검증 루프도 만들 거다. 근데 정말 다르게 일하고 있나. 책상 앞에서 화면 다섯 개를 돌아보던 사람이 폰으로 알림 다섯 개를 돌아보는 사람이 된 것뿐 아닐까. 위치만 바뀐 거라면 사냥꾼이 됐다고 할 수 있나. 아직 모른다.

농부의 사무실을 떠난 건 맞다. 사냥꾼이 됐느냐는 다른 문제다.

카프의 발언을 다시 본다. AI 시대에 경쟁력이 있는 건 ADHD라는 신경형 자체일까, 자기가 어떤 뇌인지 알고 그 뇌에 맞는 환경을 직접 짜는 사냥꾼일까. 신경형만으로 경쟁력이 생기는 시대는 아직 아닌 것 같다. 도구가 싸졌어도 자기 환경을 안 짠 사람한테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카프가 뽑고 싶었던 사람도 ADHD 그 자체보다 자기 신경형을 자원으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을 거다.

8년 동안 농부의 잣대로 나를 평가했다. 박태영, 카프, Hartmann을 거치고 나서야 사냥꾼이라는 라벨을 처음 나한테 붙였다. 이제 그 라벨에 맞는 환경을 짜기 시작했다. 다음은 그 환경에서 진짜 사냥꾼처럼 사는 일이다. 그건 기술 글로 답할 수 없고 시간이 답해 줄 일이다.

그래도 라벨을 바꿨다고 내가 바뀐 건 아니다. 사냥꾼은 잡아 온 사슴으로 증명한다. 라벨도 환경도 사슴은 아니다.

이 질문은 열어 둔다.

환경은 이제 내 손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럼 환경이 바뀌면 사람도 따라 바뀔까.


참고

  • 박태영 대표 페이스북 공개 포스트 (2026-04-21). 원문 링크.
  • 알렉스 카프(팔란티어 CEO)의 신경다양성 발언은 박태영 대표 글에서 다시 옮긴 것이다. 카프 원문의 정확한 출처와 맥락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 **Thom Hartmann의 "사냥꾼-농부 가설"**은 그의 1993년 저서 Attention Deficit Disorder: A Different Perception과 후속작 ADHD: A Hunter in a Farmer's World에서 가져왔다. Hartmann 본인도 "엄밀한 과학이 아니다(It's not hard science)"라고 인정한 사고 모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