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멀미는 여기까지, 이제 조직으로 — 강의 표지

강의를 하게 됐다

요즘 일을 좀 많이 벌여놓고 산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직을 준비하고 있고, 외부 강의를 시작했고, 양주시 창업경진대회에 1차로 선발돼서 이번주 목요일에 발표심사를 앞두고 있다. 셋 중 하나만 잡고 있어도 머리가 꽉 찰 일들인데 어쩌다 보니 세 개가 동시에 굴러가고 있다. 퇴근 후의 시간과 주말을 쪼개고 또 쪼개도 모자라서, 요즘 내 달력에는 빈칸이 잘 없다.

경기 북부 제조 현장의 흩어진 데이터를 AI로 잇는 ONE STOCK — 창업경진대회 아이템

참고로 그 발표심사에 들고 가는 아이템이다. 흩어진 제조 현장 데이터를 AI로 잇는 ONE STOCK.

그 와중에 좋은 기회로 강의 기회가 생겼다. 서울시장애인복지관 종사자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AI 활용법 강의였다. 달력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걸 받는 게 맞나 잠깐 고민했지만, 결론은 금방 났다. 한다. 이상하게 이런 제안은 꼭 제일 바쁠 때 온다. 그리고 지나고 보면, 바쁠 때 받은 제안이 대체로 남는 게 많았다.

강의가 처음은 아니다. 전에 평택시 아이사랑센터에서 다섯 살 미만 아이를 키우는 어머님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적이 있다. 그때는 정말 기초 중의 기초였다. AI라는 게 뭔지, 어디서 어떻게 여는지, 뭘 물어보면 되는지부터 시작해서 두 시간을 채웠다. 처음 보는 분들의 눈높이에 맞춰 속도를 늦추고 단어 하나하나를 풀어서 설명하는 게 그 강의의 거의 전부였다.

이번엔 결이 완전히 달랐다. 복지관에서는 이미 직원분들이 디지털복지 파이오니어스라는 자발적 학습조직을 꾸려 조직 차원으로 AI 스터디를 돌리고 계셨다. 업무 시간을 쪼개 따로 모여서 같이 공부하는 조직이라는 얘기다. 당연히 이해도가 높았고, 기본적인 건 이미 다 아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강의는 나한테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게 다가왔다. 쉬운 건 기초 설명에 시간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고, 어려운 건 이미 써본 분들 앞에서 뻔한 얘기를 꺼내는 순간 금방 티가 난다는 거였다. 늘 하던 대로는 못 가겠다 싶어서, 강의 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했다.

서울시장애인복지관 강의 현장 — 보통의 삶을 실현하는 복지관

강의안을 처음부터 다시 짰다

준비의 출발점은 섭외 단계에서 담당 팀장님이 하신 말이었다. 그 말이 강의 전까지 계속 머리에 남아 있었다.

"직원들이 AI를 못 쓰는 게 아니에요. 다들 잘 쓰는데, 각자 신기한 걸 만들어서 각자 노는 데서 멈춰 있어요. 그래서 정작 조직 업무에는 잘 안 닿고요."

못 쓰는 사람이 많아서 고민이 아니라, 잘 쓰는 사람들이 따로따로 놀아서 고민이라는 거였다.

듣는 순간 이번 강의의 주제가 정해졌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정확히 지나온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는 혼자 신기한 걸 만드는 단계에 있었다. 만들어서 보여주면 박수를 받고, 그 박수가 끝나면 다음 주에는 잊히는 것들. 그런데 그중 하나가 조직에 꽂히는 순간부터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만든 사람은 나 하나인데 쓰는 사람은 60명이 됐고, 내가 신경을 끄고 있어도 그 도구는 매일 돌아갔다. 개인의 차력쇼와 조직의 도구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하나 있고, 그 선을 어떻게 넘는지가 이 강의에서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했다.

구성도 거기에 맞춰서 다시 짰다. 이분들은 채팅으로 AI 쓰는 법은 이미 알고, 노코드 도구로 간단한 앱을 만들어 본 분들도 있었다. 그 단계를 또 다루면 두 시간이 통째로 중복이 된다. 내가 들고 갈 건 그다음 단계여야 했다. 각자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직이 같이 쓰는 도구까지 가는 단계.

그래서 두 시간을 크게 둘로 나눴다. 앞쪽 한 시간은 보여주기다. 내가 회사에서 만든 것들을 실물 화면으로 하나씩 보여주면서 비개발자도 여기까지 갈 수 있다는 걸 먼저 깔고, 그게 다 채팅창이 아니라 터미널에서 나왔다는 얘기로 넘어간다. 뒤쪽 한 시간은 직접 하기다. 각자 노트북에 CLI를 깔고, AI한테 한 줄이라도 직접 일을 시켜보는 시간. 구경만 한 건 집에 가면 남의 일로 남지만, 한 번이라도 직접 해본 건 내 일이 된다고 믿어서였다.

진단에서 방향, 구성까지 — 강의안을 다시 짠 순서

데모도 회사 얘기만 들고 가지 않았다. 화장품 회사의 재고와 경쟁사 얘기가 아무리 생생해도 복지관 업무와는 거리가 있으니까, 복지관 일에 닿는 게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강동구의 무장애 시설 35곳을 모은 지도를 터미널에서 AI한테 시켜서 만들어 갔다. 코드는 AI가 짰고, 나는 뭘 만들지와 어떤 데이터를 쓸지를 정했다. 이 강의에서 하려는 얘기가 사실 그 한 장면에 다 들어 있었다.

강동구 무장애 시설 35곳을 모은 지도 — 터미널에서 AI에게 시켜 만든 데모

"AI 그만 쫓아다니세요"로 시작했다

매일 매일 새로운 도구의 범람, AI FOMO — 강의 오프닝 슬라이드

그렇게 준비해 간 강의의 첫 마디는, 좀 엉뚱하게 시작했다.

며칠 전에 SNS에서 글 하나를 봤다. 누가 이렇게 썼다.

"오픈클로 정리하고 헤르메스로 갈아탔어요. 게임체인저예요."

좋아요가 천 개 넘게 달려 있었다. 근데 나는 그 오픈클로라는 걸 아직 한 번도 안 써봤다. 매일 AI로 일하고 회사에서 AI로 도구까지 만들어 쓰는 내가 안 써본 도구의 그다음 세대가, 벌써 게임체인저가 돼 있는 거다. 매일 새 이름이 뜨고, 그때마다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이거 모르면 큰일 난다고. 이게 요즘 속도다.

그래서 첫 질문을 이렇게 던졌다. "AI 세 글자만 봐도 좀 피곤하지 않으세요?" 웃는 분도 계셨고, 안 웃는 분도 계셨다. 어느 쪽이든 무슨 뜻인지 안다. 안 그래도 복지관 일이 산더미인 분들이다. 상담에 행사에 서류까지 쌓여 있는데, 거기다 대고 자꾸 AI를 새로 배우라고 하니 배울 시간이 어디 있겠나. 나는 이게 본업에 가까운 사람인데도 너무 빨리 바뀌어서 가끔은 그냥 다 손 놓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 피로는 부끄러운 게 아니고, 안 따라가는 게 게으른 것도 아니라고 먼저 말씀드렸다. 너무 빨리 바뀌는 쪽이 잘못이지, 우리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AI 두 글자만 봐도 피곤하지 않으세요 — 강의 오프닝 슬라이드

근데 웃긴 건, 멀미가 난다고 안 보고 있으면 이번엔 불안해진다는 거다. 그 도구 광고 카피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 똑같다. "10배 생산성, 아니면 도태." "이번 주 안에 안 옮기면 늦습니다." 다이어트 광고랑 같은 문법이다. 지금 안 하면 늦는다고 계속 조급하게 만든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그 글을 본 날 저녁에 헤르메스라는 걸 GitHub까지 들어가서 설치 안내문을 10분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픈클로도 한 번 안 깔아본 사람이 그다음 세대 설명서를 읽고 있는 거다. 멀미와 불안, 이 둘 사이에서 다들 매일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이 얘기를 먼저 했다. 이 불안의 대부분은 '안 해본 사람의 불안'이라고. 멀리서 볼 때는 엄청나 보인다. 굉장한 기술 같고, 나만 빼고 다 아는 것 같고. 근데 막상 손으로 만져보면 별거 아닌 게 정말 많다. 나도 얼마 전에 tmux라는 걸 남들이 다 좋다고 해서 윈도우 버전으로 비슷하게 만들어 봤는데, 다 해놓고 보니 원래 쓰던 방식이 더 나았다. 시간을 날렸는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아, 저거 안 해도 되는 거였구나. 안 해보면 평생 무섭고, 한번 해보면 별거 아니게 된다.

그리고 1년 넘게 직접 만들어보면서 깨달은 걸 그대로 옮겼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쓰는 도구는 거의 다 바뀌었다. 근데 내가 풀려고 하는 문제는 거의 안 바뀌었다. 재고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경쟁사가 오늘 뭘 했는지, 보고서 하나 만드는 데 왜 세 시간이 걸리는지. 도구를 쫓는 일은 끝이 없는데, 문제는 하나 풀면 정말로 하나가 사라진다. 쫓아다니는 쪽에 서 있으면 멀미가 계속되고, 푸는 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멀미가 멎는다. 만약 도구가 답이라고 믿었으면 나는 1년 동안 도구를 여섯 번은 갈아탔을 거다. 실제로 옮긴 건 두 번이고, 두 번 다 이유는 같았다. 그때 내가 못 풀고 있던 문제가 그 도구로 풀렸기 때문이다. 그 외엔 전부 광고 카피였다.

그래서 오늘 목표는 'AI 따라잡기'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제 그만 쫓아다녀도 된다는 걸 보여드리는 거라고.

도구는 매주 바뀌어도, 내 문제는 그대로다.

중요한 건 도구를 몇 개 아느냐가 아니라, 내 일에서 매일 막히는 문제 하나를 골라서 푸는 거다. 이 말을 하려고 내가 만든 것들을 들고 갔다.

내가 만든 것들을 보여드렸다

말로만 하면 안 와닿는다. 그래서 회사에서 만든 걸 실물 화면으로 몇 개 보여드렸다.

하나는 경쟁사를 추적하는 거였다. 나는 화장품을 파는 사람이고, 올리브영에서 우리 제품이 검색 몇 위에 뜨는지가 매일 중요하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내가 진짜 궁금한 건 우리 순위가 아니었다. 경쟁사가 오늘 뭘 했나, 그거였다. 어제까지 3위였던 데가 오늘 갑자기 리뷰가 73개 늘었다면 거기엔 이유가 있다. 체험단을 돌린 거다. 이런 움직임이 보여야 우리도 대응 타이밍을 잡는데, 이걸 사람이 매일 확인하려면 올리브영 검색 결과 여섯 페이지를 일일이 넘기면서 제품 129개를 하나하나 비교해야 한다. 실제로 팀원 한 명이 매일 아침 30분씩 그 일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꿨다.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확인하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안 보고도 알게 되지"로. 한 글자 차이 같지만 이게 사실상 전부다. 빨리 확인하는 건 결국 사람이 계속 그 일을 하는 거고, 안 보고도 알게 만드는 건 사람이 그 일에서 완전히 빠지는 거다. 지금은 매일 아침 9시에 어제와 달라진 것만 정리된 리포트가 알아서 도착한다. 팀원의 아침 30분은 다른 일로 돌아갔다.

매일 아침 어제와 달라진 것만 — 경쟁사 추적 리포트

또 하나는 재고 묻는 일을 대신해주는 거였다. "그 제품 재고 몇 개 남았어요?" 우리 회사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 나오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이 나올 때마다 누군가는 하던 일을 멈추고, 시스템을 뒤져서, 답을 찾아 알려줬다. 근데 아무도 이걸 문제라고 부르지 않았다. 원래 그런 거니까. 나는 이 "원래 그런 거"라는 말이 제일 무섭다. 조직이 멀쩡히 피를 흘리고 있는데, 다들 너무 익숙해져서 그게 출혈인 줄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미 쓰고 있는 메신저 안에 답을 넣었다. 새 앱을 만들어서 "이거 깔아서 쓰세요" 했으면 장담컨대 아무도 안 썼을 거다. 어차피 매일 들어와 있는 메신저에서 채팅 치듯 물어보면 봇이 바로 답을 주는 구조로 만들었더니, 지금은 60명이 매일 쓴다. 만드는 데 2주가 걸렸고, 중간에 백엔드를 통째로 날려먹고 다시 짠 날도 있었다. (그날은 좀 울고 싶었다.)

메신저에서 '/재고' 치면 0.8초 — 60명이 매일 쓰는 재고봇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였다

이 사례들을 보여드리면서 관통시키려던 메시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였다.

각자 차력쇼 하지 말고, 조직에 꽂자.

AI로 신기한 걸 만들면 박수는 받는다. 근데 다음 주에 아무도 안 쓰면 그건 거기서 끝난 거다. 분명히 해두자면 차력쇼가 나쁜 게 아니다. 누구나 거기서 시작하고, 나도 거기서 시작했다. 문제는 거기서 멈추는 거다. 개인의 실험은 그 사람이 퇴근하면 같이 퇴근한다. 만든 사람이 흥미를 잃으면 도구도 같이 죽는다. 조직에 꽂힌 도구는 다르다. 내가 자리를 비워도 돌아가고, 내가 없어도 팀이 쓰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조직이 일하는 방식 자체가 된다.

자랑샷 한 장 찍고 다음 주면 잊히는 것, 이걸 차력쇼라고 부른다 — 강의 슬라이드

그 차이를 만드는 순서를 세 단계로 정리해서 드렸다.

[ 01 ]

병목을 고른다

신기한 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병목을 고를 것. 화려한 데모가 아니라 다들 지겨워하는 일에서 시작해야 쓰는 사람이 생긴다.

[ 02 ]

작게, 혼자 만든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걸로 작게 만들 것.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리면 완성을 못 하고, 완성을 못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03 ]

이미 쓰는 도구에 넣는다

새 앱을 깔게 하지 말 것. 사람들은 새로운 걸 배우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익숙한 자리에 답이 와 있어야 쓴다.

우리 회사 재고봇이 정확히 이 순서로 만들어졌다. 거창한 전사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루 수십 번 나오는 질문 하나에서 시작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복지관이라서 한 가지를 더 보탰다. 장애인 이용자 정보처럼 민감한 데이터를 다루는 곳이니, 빨리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 데이터가 어디에 저장되고 어디로 나가는지를 같이 챙겨야 한다는 것. 신나서 만들다 보면 제일 먼저 잊는 게 이 부분인데, 조직이 믿고 쓰는 도구가 되려면 사실 이게 먼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코딩 실력이 아니라, 우리 조직이 어디서 매일 멈추는지 보는 눈이라고 했다. 코드는 이제 AI가 짠다. 그것도 나보다 훨씬 잘 짠다. 근데 "여기가 우리가 매일 멈추는 자리다"를 알아보는 건 AI가 못 한다. 그건 매일 그 현장에 서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여러분이 나보다 낫다고 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화장품 회사의 현장을 알지만, 복지관에서 매일 어디서 종이가 쌓이고 누가 같은 내용을 두 번 세 번 옮겨 적는지는 그 안에 계신 분들이 안다. 도구는 배우면 되는데, 그 눈은 밖에서 못 가져온다. 그리고 그 눈은 이미 갖고 계신 거다.

CLI는 꼭 경험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무섭게 생겼죠? 그냥 대화하는 창이에요 — 실습용 터미널 슬라이드

실습을 굳이 CLI로 잡은 건 고집에 가까웠다. 사실 더 쉬운 길이 있었다. 채팅 화면에서 프롬프트 잘 쓰는 법 정도로 실습을 잡으면 사고가 날 일이 없다. 다들 익숙한 화면이고 막힐 데가 없으니까. 근데 그건 이분들이 이미 아는 거였다.

무엇보다, 채팅으로는 '조직에 꽂는 단계'까지 못 간다.

채팅창으로도 AI는 충분히 쓸 수 있다. 근데 채팅은 한 창 안에서 끝난다. 길게 일하다 보면 AI가 앞에서 한 말을 까먹어서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하고, 좋은 결과물이 나와도 그걸 복사해서 옮겨 붙이는 건 결국 내 몫이다. 도구를 만들어서 조직이 같이 쓰는 데까지 가려면 AI한테 직접 일을 시키고, 그 결과가 파일로 차곡차곡 쌓이고, 만든 걸 실제로 돌려볼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하다. 그게 터미널이고 CLI다. 앞에서 보여드린 것들도 전부 거기서 나왔다. 이걸 말로만 듣고 가시는 것과 단 한 번이라도 손으로 해보고 가시는 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채팅은 더듬기, CLI는 정리된 노트 — 기억 비유 슬라이드

채팅은 전화 A/S, CLI는 출장 기사 — 내 파일 비유 슬라이드

문제는 이 화면이 처음 보면 무섭게 생겼다는 거다. 검은 바탕에 커서만 깜빡인다. 클릭할 버튼도 없고 메뉴도 없다. 그래서 준비를 여기에 제일 많이 들였다. 설치 안내문을 미리 보내드렸고, 설치 과정을 단계별로 정리한 웹 가이드 페이지를 따로 만들어서 배포했고, 현장에서는 QR 코드 하나만 찍으면 그 가이드가 바로 열리게 했다. 설치 명령은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면 되는 한 줄로 줄였고, 중간에 겁먹고 멈추는 분이 없도록 "빨간 글씨가 떠도 고장 난 게 아닙니다" 같은 안심 문구까지 박아뒀다. 여기까지 해놨으니 되겠지 싶었다.

구독 종류별 안내와 "빨간 글씨가 떠도 고장 난 게 아닙니다" 안심 문구까지 — 설치 웹 가이드

그런데 실습에서 막혔다

그렇게까지 준비했는데도, 당일에 막혔다.

가이드에 적힌 그대로 파워셸에 붙여넣었는데도 오류가 나는 경우가 잦았다. 같은 안내문에 같은 명령어인데 노트북마다 다른 데서 걸렸다. 보안 설정이 막아서는 노트북이 있었고, 권한을 물어보며 멈추는 노트북이 있었고, 이유를 바로 알기 어려운 빨간 글씨를 토해내는 노트북이 있었다. 한쪽을 풀어드리면 다른 쪽이 막혔다. 앞에서는 진도를 나가야 하는데 옆에서는 손이 올라오고, 현장이 다소 어지러웠다.

흥미로웠던 건, 이미 AI를 잘 쓰시던 분들도 이 검은 화면 앞에서는 다들 조용해지셨다는 거다. 채팅창에서는 능숙하던 분들이었다. 화면이 바뀌었을 뿐인데 공기가 달라졌다. 사실 이건 준비하면서 제일 걱정한 부분이었고, 걱정한 딱 그대로 됐다. 강의장에서 설치를 통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데 몸으로 또 한 번 배웠다.

그래도 좋았던 건

그런데 그 화면을 자기 손으로 넘으신 분들의 표정이 달랐다.

설치가 끝나고 터미널에서 AI가 첫 대답을 했을 때, 막히던 게 풀리고 화면에 뭔가 떴을 때, 작게 "어, 됐다" 하시는 거. 그 짧은 소리가 강의 내내 제일 기억에 남는다. 내가 슬라이드를 아무리 잘 만들고 아무리 잘 떠들어도 그 표정은 못 만든다. 그건 본인이 직접 막혀보고 직접 넘어본 사람한테만 나오는 표정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안다. 처음 터미널을 열었을 때 나도 그 검은 화면이 무서웠고, 빨간 오류를 보고 그냥 창을 닫아버리고 싶던 날이 있었다. 그걸 한 번 넘고 나서야 다음이 열렸다. 구경으로는 안 열리는 문이다. 그래서 막히신 분들 옆에 붙어서 같이 풀어드리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마찰이 오늘 두 시간에서 제일 비싼 부분이라는 걸.

만약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매끄럽게 다 깔아드렸으면 "어, 됐다"는 아마 안 나왔을 거다. 직접 막혀보고 넘어봐서 나온 소리니까. 통제가 어려웠던 만큼 성취감이 컸고, 둘은 정확히 트레이드오프였다. 결과적으로는 어지러웠던 현장까지 포함해서 좋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강의를 마치고 다음 강의를 위한 메모에 이렇게 적어뒀다. 설치는 최대한 사전 숙제로 돌릴 것. 막힌 사람을 위한 안전망은 미리 깔아둘 것.

단, 마찰을 0으로 만들지는 말 것.

그 마찰이 성취감의 원천이니까. 가르치러 갔다가, 그걸 내가 다시 배웠다.

끝나고

현장의 불편함을 알아채는 눈은 여러분이 낫다, 그 눈만 있으면 도구는 따라온다 — 강의 엔딩

좋은 자리였다. 이미 열심히 하고 계신 분들이라 더 그랬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나는 회사에서 이걸 한 번도 말로 정리해 본 적이 없었다. 병목을 고르고, 작게 만들고, 이미 쓰는 도구에 넣는다는 그 세 단계도 원래 내 머릿속에 프레임으로 박혀 있던 게 아니다. 남한테 두 시간 안에 설명하려고 강의안을 짜다가, 내가 그동안 회사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가 그제서야 한 줄로 세워졌다. 만든 건 회사에서였는데, 그게 뭐였는지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알았다.

만드는 일과 가르치는 일은 비슷해 보여도 쓰는 근육이 다르다. 내가 한 걸 남이 알아듣게 풀어야 비로소 그게 내 안에서도 또렷해진다. 따지고 보면 이직 면접도, 곧 있을 발표심사도, 결국 내가 뭘 만들었고 그게 왜 됐는지를 남이 알아듣게 설명하는 일이다. 이번 두 시간은 그 연습이기도 했다.

도구는 다음 주에도 새로 나올 거다. 누군가는 또 갈아탔다고 쓸 거고, 좋아요는 또 천 개씩 달릴 거다. 나는 아마 여전히 오픈클로를 안 써봤을 거고. 근데 그날 검은 화면을 자기 손으로 넘은 분들은 이제 좀 다른 걸 갖고 있다. 새 도구 소식에 마음이 급해지지 않아도 되는, 내 문제를 내 손으로 하나 풀어본 경험. 그건 다음 도구가 나와도, 그다음 도구가 나와도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코딩 못 하는 마케터다. 회사에서 매일 멈추던 일 하나를 풀었을 뿐인데, 그 얘기가 강의가 됐고, 어느 조직의 두 시간 강의 거리가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나는 다시 벌여놓은 일들 사이로 돌아왔다. 이직 준비도, 이번 주 발표심사도 그대로 기다리고 있고, 달력은 여전히 빽빽하다. 근데 이 두 시간은 그 빽빽한 일정 중에서 꽤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