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inders를 만들기로 했다. 시장부터 봤다.

주방용품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어떤 소재로, 어떤 제품을 만들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는 시장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먼저 봐야 했다.

감으로 시작할 수는 없었다. 좋아 보이는 소재가 아니라, 시장이 아직 채우지 못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먼저 찾는 것이 순서였다. 이 글은 그 첫 번째 조사의 기록이다.

국내 주방용품 시장은 2019년 기준 약 2조원 규모로 추산된다. 주요 구매층은 독립 생활을 시작하는 20대 중반부터 은퇴를 앞둔 60대 중반까지 폭이 넓다.

₩2조 시장인데, 독보적인 1위가 없다.
국내 1위로 추정되는 업체의 점유율도 4-5% 수준이다.
사실상 아직 주인이 정해지지 않은 시장이다.


시장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시장을 키운 요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으면서 리빙 용품 산업이 자연스럽게 성장했다. 둘째, 코로나로 집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집에서 한 끼를 먹어도 제대로 먹겠다"는 소비 심리가 확산됐다.

쿡웨어 시장

여기에 유튜브 쿡방, 먹방 콘텐츠가 겹치면서 고급스러운 주방용품에 대한 노출 빈도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G마켓의 2019년 데이터를 보면, 프리미엄 주방용품 판매량이 5년 전 대비 40% 증가했고, 1인당 평균 객단가는 최대 5배(424%)가 올랐다. 5년 전에 1만원을 썼다면, 작년엔 5만원을 쓴 셈이다.

프리미엄 쿡웨어

중요한 건 이 변화가 일시적인 트렌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득 수준이 오르면 소비자는 더 오래 쓸 수 있는 제품, 더 건강한 소재, 더 의미 있는 브랜드로 이동한다. 유럽이나 일본 시장이 그랬듯이, 국내 주방용품 시장도 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시장은 커지고 있는데, 독보적인 강자가 없다.


"친환경 스테인레스 브랜드"를 떠올릴 수 없다는 것

2020년 테팔, 해피콜 같은 주요 브랜드들이 'Eco', 'Green for next', 'Safe' 같은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웠다. 친환경,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리브랜딩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그 브랜드들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건 코팅 팬이다. 코팅 팬은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

오래된 브랜드의 한계가 여기 있다. 수십 년간 코팅 팬을 팔아온 회사가 "이제 우리는 친환경입니다"라고 말해도, 소비자의 첫 번째 연상은 바뀌지 않는다. 퍼셉션은 한번 굳으면 깨기 어렵다.

반면, 스테인레스를 주력으로 내세우는 '아이코닉한' 국내 브랜드는 없었다.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소재인 스테인레스 시장의 주인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알루미늄 팬의 시장 장악력이 너무 강해서 진입 자체를 시도하지 않았거나, 시도했더라도 영향력을 키우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알루미늄 팬부터 제대로 들여다봤다.


알루미늄 팬의 두 가지 문제

알루미늄 코팅 팬은 가볍고 익숙하다. 눌어붙지 않고, 접근성도 좋다. 그게 지금까지 시장을 장악한 이유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두 가지 있다.

다크워터스

첫 번째: 안전성

테프론 코팅 성분인 PFOA는 2020년 개봉한 영화 '다크워터스'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졌다. 유럽에서는 그전부터 위험성을 인지하고 스테인레스 사용이 보편화된 상태였다.

코팅이 벗겨진 알루미늄 면에서 검출되는 중금속은 알츠하이머를 유발하며, 체내에 축적되어 신경 기능을 손상시킬 위험이 있다. 테프론을 대체하기 위해 출시된 다른 코팅 소재들도 안전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테인레스는 반대다. 표면에 크롬 산화막을 형성해 부식을 방지하고, 물에 닿으면 음전하를 띠어 세균과 냄새의 원인 물질을 분해하는 항균, 소독 작용을 한다. 의료기구에 쓰이는 소재가 주방에 들어오는 것이다.

두 번째: 제품 수명

알루미늄 코팅 팬의 내열성은 낮다. 팬을 연기 날 정도로 달구면 코팅이 벗겨지고 바닥이 비틀어진다. 비틀어지면 인덕션 화구와 바닥면이 맞닿지 않아 열전도율이 떨어지고, 쿠킹 오일이 팬 가장자리로 겉돌게 된다. 사실상 제품으로서의 수명이 끝난 것이다.

소비자 리뷰에서 확인한 알루미늄 코팅 팬의 교체 주기는 1년 내외. 1년마다 버려지는 팬이다. 환경 측면에서도, 소비자의 지출 측면에서도 낭비다.

스테인레스는 다르다. 28cm 기준 무게는 1.35kg으로 주물 팬(3kg)보다 훨씬 가볍고, 5Ply 구조는 열전도율이 높다. 의료기구에도 사용되는 STS316 소재는 염분이 많은 음식과 장기간 접촉해도 부식되지 않는다. 반영구적이다.


결과 — 왜 스테인레스인가

₩2조국내 주방용품 시장 규모
+40%G마켓 5년간 판매량 증가
424%객단가 신장 (1만 → 5만원)
4-5%업계 1위 점유율 (춘추전국시대)

시장이 커지고 있고, 독보적 강자가 없고, 소비자들이 안전과 지속 가능성에 눈을 뜨고 있는데, 스테인레스를 주력으로 하는 브랜드는 없다.

기존 강자들은 코팅 팬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소규모 스테인레스 브랜드들은 팬덤 안에 갇혀 신규 고객에게 닿지 못한다. 이 틈새가 Grainders의 자리였다.

이게 Grainders가 이 시장에 들어가기로 한 이유다.


이어서

다음 편에서는 현재 시장의 경쟁자들을 분석한다. 스테인레스 시장이 왜 아직 비어있는지, 기존 브랜드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Grainders가 어떤 포인트로 차별화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