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제품, 누가 살까?"

'Grainders' 브랜드를 론칭하기로 마음먹고 제일 먼저 공장을 찾아다녔다.
보름 남짓 국내 쿡웨어 생산 현장을 직접 돌았다. 콧대 높은 메이저 공장에서는 최신 공정과 업계 트렌드를 어렵게 배웠다. 한때 호황이었다가 오더가 끊겨 기계를 세워둔 공장에서는 시장의 구조적 한계를 가감 없이 들었다.
두 곳 모두 배울 게 있었다. 근데 다 듣고 나니 질문 하나가 남았다.
"이 제품, 도대체 누가 살까?"
시장 규모와 생산 공정을 아무리 알아도 이 질문에 답을 못 하면 브랜드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페르소나 모델링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페르소나란 무엇인가
페르소나는 상상이 아니다.
경험과 리서치로 설계한 실제에 가장 가까운 가상의 고객이다.
페르소나 모델링은 목표 인구 집단 안의 사용자 유형마다 대표 인물을 하나씩 가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30대 직장 여성"처럼 뭉뚱그리면 안 된다. 직업, 소득, 생활 패턴, 관심사, 소비 행동까지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
설계 원칙은 세 가지다.
가상화(Virtualization): 설문이나 사용 후기 같은 실제 자료로 고객 경험을 파악하고 거기서 니즈를 뽑아 가상 인물을 만든다. 상상만으로 만들면 안 되고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
리서치 기반: 정성 조사(인터뷰, 관찰)와 정량 조사(설문, 통계)를 둘 다 써야 페르소나를 믿을 수 있다. 한쪽만 보면 편향된다.
오염 방지: 만드는 사람이 보고 싶은 쪽으로 데이터를 재해석하면 그 순간 페르소나는 쓸모없어진다. 리서치 결과는 있는 그대로 넣는다.
가상 고객 4명
Grainders 잠재 고객군을 분석하다 보니 4명이 떠올랐다. 창업 준비자, MZ 마케터, 감성 공무원, 맞벌이 새댁. 주방용품에 끌릴 이유가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다.
김산호: 레트로 곱창집을 준비하는 40대 돌싱남
학력
부산 동래 고등학교 졸업. 국민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학회장 1년)
경력
[한세실업] 과장 - 해외영업팀 (4년간 근무), 코로나 경영악화로 희망퇴직 신청 예정 [화승] 대리 - 해외영업팀 (5년간 근무)
소득 및 지출
- 月 수익: 450 만원
- 저축: 280 만원
- 생활비(유류/경조사/식사/월세): 80 만원
- 꾸밈비(의류/잡화/미용): 60 만원
- 홧김비용: 30 만원
PROFILE
42세 김산호. 돌싱남. 공덕동 한화 오벨리스크 오피스텔에 살고 도요타 캠리 하이브리드를 몬다. 차는 늘 깨끗하다. 주말에 할 일이 없으면 자동차 동호회에 나가 드라이브를 한다.
어릴 적 부모님이 한우집을 하셔서 고기부심이 강하다. 고깃집에서 집게는 웬만해선 안 넘기고, 마이야르 반응이나 캐러멜라이징을 옆 사람에게 설명하길 좋아한다.
코로나로 실적이 떨어지자 이참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기로 했다. 모은 돈에 퇴직금을 보태 구로디지털 단지역 상권에 레트로 곱창집을 열 생각이다. 요즘은 노포부터 한창 뜨는 레트로 식당까지 돌며 창업을 준비한다.
유튜브 알고리즘: [곱창, 창업, 요리, 자동차]
나은송: 사회 이슈에 관심 많은 MZ 마케터
학력
인천 금송 고등학교 졸업. 세종대학교 영문학과 졸업.
경력
[에프엔에프] 대리 -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2년간 근무) [크래커랩] 대리 - 콘텐츠 에디터 (2년간 근무)
소득 및 지출
- 月 수익: 340 만원
- 저축: 150 만원
- 생활비(유류/경조사/식사/월세): 80 만원
- 꾸밈비(의류/잡화/미용): 80 만원
- 홧김비용: 30 만원
PROFILE
29세 나은송. 천호동 투룸에 산다. 사회 이슈에 관심이 많아 장애인 인권 보호 재단, 제로웨이스트 마켓,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종로구 도시재생 프로젝트로 진행한 동네출판사 집필에도 손을 보탰다.
목공소 공방을 하는 친구 덕에 요즘은 의자를 만든다. 근데 자투리 목재로 인테리어 소품을 만드는 쪽이 더 재밌다. 글 쓰는 걸 좋아해서 브런치에 이것저것 기록한다.
비건 문화를 경험해 보려고 #한끼채식도전 챌린지를 하고 있다. 가볍게 채식 한 끼를 하며 환경과 동물을 생각하고, 탄소배출량을 줄이는 데서 보람을 느낀다.
유튜브 알고리즘: [비건, DIY, 인문학, 환경운동]
박윤동: "공무원스럽다"는 말을 가장 싫어하는 9급 공무원
학력
대전 한빛 고등학교 졸업. 충남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경력
[하동면 각동3리 주민센터] 근무 (3호봉)
소득 및 지출
- 月 수익: 210 만원
- 저축: 100 만원
- 생활비(유류/경조사/식사/월세): 40 만원
- 꾸밈비(의류/잡화/미용): 50 만원
- 홧김비용: 20 만원
PROFILE
32세 박윤동. 경남 하동면 빌라에 산다. 차는 08년식 NF소나타 중고다. ENTP형이고 "공무원스럽다"는 말만은 듣지 않으려고 애쓴다. 트렌드에 민감하고 커피를 좋아해서 주말이면 부산이나 대구까지 인스타 핫플레이스를 찾아간다.
최근 5살 연하 여자친구가 생겼다. 주말마다 투룸으로 찾아오는데 구질구질한 자취방을 보여주기 싫어서 리빙데코에 부쩍 관심이 생겼다. 이케아에서 스테인레스 설거지 거치대와 냄비 세트를 사 보니 주방이 한 단계 고급져진 것 같았다. 프라이팬은 해피콜보다 휘슬러가 좋다던데 가격이 걸린다.
유튜브 알고리즘: [리빙데코, 피식대학, 자취생요리]
한수지: 결혼 1년차 맞벌이 새댁
학력
서울 창신 고등학교 졸업. 경기대학교 국제관광학과 졸업.
경력
[엠케이로드] 주임 - 경영지원팀 회계담당 (2년간 근무)
소득 및 지출
- 月 수익: 270 만원
- 저축: 150 만원
- 생활비(유류/경조사/식사/월세): 30 만원
- 꾸밈비(의류/잡화/미용): 50 만원
- 홧김비용: 40 만원
PROFILE
29세 한수지. 결혼 1년차 맞벌이 새댁. 양천구 신정동 3룸 빌라에 산다. 광고 에이전시 AE인 남편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한다.
맞벌이인데도 가사는 거의 혼자 맡는다. 생필품은 쿠팡과 홈쇼핑으로 주문하는데 분리수거 양을 감당할 수가 없다. 제일 귀찮은 가사 중 하나다.
전형적인 O형이라 원만하고 인간관계가 넓다. 비혼주의자 친구 김여진씨 영향으로 요즘 제로웨이스트에 조금씩 관심이 생겼다.
유튜브 알고리즘: [브이로그-새댁일기, 육아, 맞벌이맘]
결과
4명을 설계하다 보니 공통점이 보였다. 취향은 달라도 다들 주방에 '의미'를 두려는 사람들이었다. 싸거나 예쁜 것보다 자기 라이프스타일에 맞는 제품을 원한다.
공통으로 나온 키워드는 세 가지였다. 건강, 지속 가능성, 주방에 대한 자부심. 이 세 가지가 Grainders 브랜드 방향을 정하는 기준이 됐다.
돌아보니
페르소나는 완성되는 게 아니다.
시장과 고객이 바뀌면 계속 고쳐야 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답'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공장을 돌며 시장을 배운 그 2주가 페르소나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재료였다. 데이터만 봤다면 안 나왔을 디테일이 현장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채워졌다.
마케터가 페르소나를 만들 때 제일 흔한 실수는 자기가 팔고 싶은 사람을 그려 놓고 페르소나라고 부르는 거다. 그런 페르소나는 현실의 누구도 대표하지 못한다.
경험에서 출발해 리서치로 검증하고 편향을 경계한다. 페르소나 모델링에서 할 일은 결국 이 세 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