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를 한 달 만에 나왔다

작년 10월 퇴사를 결심하고, 12월 말에 회사를 떠났다. 구직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연락이 꽤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은 이력서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접근하는 헤드헌터들이었다.
퇴사 일주일 전, 에이전시에서 면접 제의가 왔다. 시장에서 내 가치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입사했다. 그리고 한 달 만에 나왔다.
두 번의 빠른 퇴사. 자존감이 낮아진 상태에서 포트폴리오를 처음 만들어야 했다.
포트폴리오를 만든다는 건 과거를 정리하는 게 아니다.
다음에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으로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컨셉부터 잡았다: Underdog
가장 먼저 정한 건 컨셉이었다. 블로그와 브랜드에서 계속 써온 'Underdog' 키워드를 포트폴리오에도 그대로 가져갔다.
구글링으로 여러 포트폴리오 양식을 찾아보다가, 퍼블리 마케터 임지은님이 배포한 템플릿을 기반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제작 도구는 포토샵 대신 망고보드를 썼다.
6파트 구성으로 잡았다.
포트폴리오 구성 6파트
1. 표지

Underdog 키워드를 중심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비주류이지만 결국 이긴다"는 내러티브가 내 커리어와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첫 장에 컨셉을 박아두면, 나머지 모든 내용을 그 맥락 안에서 읽게 할 수 있다.
나중에 마개이너 스터디 분들과 스타트업 매칭 플랫폼 운영자로부터 피드백이 돌아왔다. "자신을 언더독으로 칭하는 게 너무 스타트업스럽다. 채용담당자들은 메이저 출신을 더 선호한다."
메이저 경력이 없고, 이 컨셉에 만족한다. 바꾸지 않기로 했다. 오히려 이 컨셉에 공감하는 회사라면, 나를 제대로 쓸 수 있는 곳일 가능성이 높다.
2. 지원동기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희망 기업명과 직군을 기입하는 페이지다. 지원할 때마다 맞춤 수정하는 파트다. 단순 나열이 아니라, 해당 기업의 제품이나 마케팅 방향에서 내가 실제로 공감한 부분 한 가지를 구체적으로 쓰는 게 원칙이었다. 채용담당자가 "이 사람이 우리 회사를 제대로 봤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3. 간단한 이력

개인 사진, 기본 정보, 블로그, 경력 항목을 포함했다. 강조하고 싶은 내용으로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다.
참고로 한 달 다니고 나온 에이전시는 포함하지 않았다. 스스로 자랑스럽지 않은 경력은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짧은 재직 기간을 해명하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 제대로 잘 했던 경험에 집중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4. 자기소개

선망하던 여러 기업의 인재상을 공부하면서, 내가 어떤 마케터인지를 구체적으로 써내려갔다. 보통 자기소개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로 시작하는데, 그게 제일 약한 방식이다. 대신 내가 실제로 해결했던 문제와 그 과정에서 발견한 내 특성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썼다. '역량'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작동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포인트였다.
5. 경력기술서

주요 업무를 몇 가지로 나눠 서술형으로 정리했다. 네 가지 항목이 기본 구조인데, 지원하는 기업의 업무와 가장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우는 게 중요하다.
숫자가 없으면 신뢰가 없다는 걸 이 과정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광고를 운영했다"가 아니라 "ROAS 5.2, 월 집행액 800만 원 규모의 캠페인을 단독 운영했다"처럼 구체화해야 읽히는 경력기술서가 된다. 그래서 과거 캠페인 데이터를 다시 꺼내서 수치를 재정리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6. 포트폴리오

업무 역량을 단락별로 분류하고, 프로젝트를 보여주는 이미지나 그래프를 오른쪽에 배치하는 구조다. 텍스트만 빽빽하면 읽히지 않는다. 광고 소재, 결과 지표 스크린샷, 상품 페이지 이미지 등 시각 자료가 한 페이지에 한 장 이상 들어가도록 구성했다. 보는 사람이 텍스트를 다 안 읽어도, 이미지만 훑으면 "이 사람이 어떤 일을 했는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결과
돌아보며
포트폴리오를 만들면서 지난 몇 년의 커리어를 되돌아봤다. 최선을 다했던 기억은 많은데,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아웃풋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트폴리오는 결과물을 모으는 게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게 있어야 컨셉도 살아난다.
Underdog 컨셉을 유지하기로 한 건 메이저 경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 컨셉이 앞으로 내가 만들고 싶은 것과 닿아 있기 때문이다. 누가 뭐라 해도 컨셉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