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개발 미팅 테이블에 경쟁사 토너 세 개가 올라와 있었다. 다들 손등에 발라봤다. "쫀득하네요." "향 좋네요." "이거 올영에서 요즘 제일 나가요." 20분 뒤 우리 신제품 방향이 정해졌다.

그 토너를 사서 쓴 사람은 1만 9천 명이다. 그중 한 명은 올리브영에 이렇게 썼다.

향.. 무슨 일이죠. 원래 상큼했던 향이 무슨 바비인형 플라스틱 머리 냄새로 바꼈네요. 괜히 샀음.. 왜 잘 팔리면 리뉴얼들을 해댈까요. 토니모리가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갈랐네..

다른 리뷰엔 "주차장에 오래 냅둔 바비인형 냄새"라고 적혀 있다. 그 밑에 누가 "이건 좋게 말해준 거고 오래 묵힌 먼지 냄새"라고 받아쳤다. 나는 토니모리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근데 이 회사가 리뉴얼하면서 향을 바꿨고 그게 잘 안 됐다는 것까지 안다. 리뷰 1만 9천 건이 알려줬다.

그 향이 뭔지도 안다. 화해 성분표에 다 적혀 있다. 착향제 계열 7종, 그중 알레르기 주의성분 2종이다. 리뷰는 결과고 성분표는 원인이다. 둘을 겹쳐 보면 저 1점 리뷰가 취향 문제가 아니라 처방 문제였다는 게 드러난다.

회의실에서 우리는 품평을 했다. 손등에 바르고 향 맡고 20분 만에 끝났다. 그 제품을 산 사람들은 몇 달을 써 보고 올리브영에 리뷰를 남겼다. 그게 1만 9천 건이다.

우리는 "향 좋네요"라고 했는데 산 사람 중 81명은 "인공향"이라고 썼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근데 그날 방향은 손등만 보고 정했다. 인공향이라는 말은 원래 토니모리 개발팀 회의에서 나왔어야 한다. 그 말이 지금 올리브영 리뷰창에 적혀 있고 토니모리도 그걸 못 읽는다. 1만 9천 건이니까. 하루 100건씩 읽어도 반년이다.

테이블 위에 제품은 있는데 고객은 없다

제조업 기반 뷰티 회사에서 브랜드사업부를 맡고 있다. 마케터 8년차고 최근엔 제품개발 기획까지 하게 됐다. 그 미팅은 순서가 늘 같다. 벤치마크 제품 고르고, 발라보고, 성분표 보고, 단가 맞추고. 개발팀은 처방을 본다. 이 성분이 이 농도에서 효과가 있다는 논문 근거를 붙여 검토한다. 브랜드팀은 소구를 본다. 소구 포인트를 어떻게 더 뾰족하게 세울지 붙잡고 있다. 둘 다 자기 일을 제대로 하는 거다. 근데 그 사이에 하나가 빠져 있다. 그 제품을 이미 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리뷰를 안 본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신제품 얘기가 나오면 경쟁 제품 리뷰부터 판다. 문제는 읽은 게 회의까지 못 살아남는다는 거다. 1만 9천 건 중 몇백 건 읽고 나머지는 못 본 척했으니까. 그렇게 인상 몇 개랑 인용 몇 줄만 들고 회의에 들어갔다. 위의 바비인형 리뷰가 딱 그런 거다. 재밌는데 회의에선 아무 힘이 없다. "그거 한 명 얘기잖아요" 한마디면 끝난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한 명 얘기로 처방을 바꿀 순 없다.

그래서 이번엔 읽지 말고 세보기로 했다. 몇 명이 그러는지 숫자가 나와야 회의에서 안 밀린다.

문제는 셀 게 1만 9천 건이라는 거였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다.

그럼 나 말고 누가 하나. 사람을 붙여달라고 할 일은 아니고, 붙여 줘도 이것만 시킬 순 없다. 그래서 만들기로 했다. 정확히는 이 일을 할 때의 나를 복제하기로 했다. 경쟁사 리뷰를 볼 때 내가 뭘 먼저 열고 뭐부터 세는지, 그 순서를 그대로 옮겨 담을 생각이었다.

도구 하나 붙이는 일과는 달랐다. 도구는 빠르면 그만인데 이 일은 뭘 세느냐가 전부다. 빠르기만 해서는 소용없고 나처럼 봐야 했다.

왜 하필 헤르메스였나

AI 에이전트를 하나 붙여야겠다는 생각은 작년부터 했다. 매번 다음에 하자며 넘겼다.

올해 들어 그록 봇 얘기가 계속 눈에 띄었다. 에이전트마다 클라우드 컴퓨터를 한 대씩 주고, 노트북을 닫아도 알아서 일한다고 한다. 가격은 좌석당 월 120달러부터다. 이만큼 시끄러우니 미뤄둔 걸 꺼낼 때가 됐다 싶었다.

리뷰 분석 리포트 표지. 화해 19,019건, 올리브영 596건, 화해 스킨/토너 보습 1위
대화창에 제품 이름을 넣으면 이 리포트가 온다. 표지에 화해 19,019건, 올리브영 596건이 먼저 찍혀 있다

찾아보기 전에 조건부터 적었다. 나 혼자 쓸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나, 결과물은 팀 전체가 받아야 한다. 나만 열 수 있으면 만들 이유가 없다. 둘, 아무도 새로 배울 게 없어야 한다. 셋, 경쟁사 리뷰든 우리 판매 데이터든 회사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넷, 쓰는 사람 수만큼 돈이 붙으면 안 된다. 팀 전체가 쓰는데 좌석당 과금이면 마음 놓고 쓰라고 못 한다.

이 네 가지에서 후보가 거의 다 떨어졌다.

화제가 된 상용 에이전트는 죄다 슬랙에 붙는다. 우리 회사 메신저는 팀즈다. 사서 쓰는 길은 여기서 막혔다. 사내 대시보드를 하나 만드는 것도 생각했는데 두 번째 조건에 걸린다. 주소를 따로 알려줘야 하고 로그인도 한 번 더 해야 한다. 두 번 안 열면 없는 도구다. 그런 도구를 몇 번 봤다.

그러다 몇 달 전에 본 글이 생각났다. 오픈클로 정리하고 헤르메스로 갈아탔다고, 게임체인저라고 쓴 글에 좋아요가 천 개 넘게 달려 있었다. 그때는 오픈클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다음 세대 얘기를 읽는 게 웃겨서 넘겼다. 이번에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헤르메스는 노우스 리서치가 만든 오픈소스 AI 에이전트다. 챗봇과 다른 점은 말만 받아주지 않고 시키면 실제로 일을 한다는 거다. 데이터를 직접 가져와 세고 문서로 만들어 넘긴다.

네 조건에 다 맞았다. 오픈소스라 내 컴퓨터에서 돌고 데이터가 밖으로 안 나간다. 회사에서 이미 쓰는 코파일럿 구독을 그대로 물릴 수 있어서 사람이 늘어도 돈이 안 붙는다. 무엇보다 사이트를 따로 만들 필요 없이 메신저 안에 들어가 산다. 팀즈는 다들 하루 종일 켜놓으니 거기 있으면 배울 게 없다. 그냥 말을 걸면 된다.

내가 그리던 그림은 이랬다. 제품 기획하다 경쟁사가 궁금해진 사람이 팀즈 창에 제품 이름 하나를 던진다. 1분쯤 뒤 리포트가 온다. 던진 사람이 개발팀이든 브랜드팀이든 상관없고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근데 그릇을 고른 건 절반이다. 담을 게 있어야 한다. 헤르메스는 시키는 걸 할 뿐 뭘 셀지는 모른다. 기준을 잘못 주면 틀린 걸 빨리 가져온다.

그래서 옮길 것부터 적었다. 경쟁사 리뷰를 볼 때 내가 어떤 순서로 보는지 글로 써 봤다. 쓰고 나서야 여섯 단계라는 걸 알았다. 매번 감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순서가 있었다.

올리브영과 화해에서 나오는 데이터는 다르다

리뷰 볼 곳은 여러 군데지만 스킨케어는 이 두 곳이면 대부분 커버된다. 올리브영은 실제로 돈 내고 산 사람만 리뷰를 쓸 수 있는 유통 채널이다. 화해는 성분을 따져 보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앱이다. 모이는 사람이 다르니 같은 제품이어도 나오는 데이터가 아예 딴판이다.

올리브영에서는 문장이 나온다. 596명이 자기 말로 쓴 리뷰고, 재구매인지 한 달 넘게 썼는지 표시도 붙는다. 사람 수는 적지만 왜 그랬는지가 적혀 있다. 화해는 다르다. 읽을 문장은 거의 없고 숫자가 쌓여 있다. 1만 9천 명이 고른 좋아요·아쉬워요 태그, 카테고리 안에서 몇 등인지, 전성분 34개가 각각 뭔지. 몇 명이 그러는지가 여기선 숫자로 나온다. 처방도 여기 있다.

하나만 보면 반쪽이다. 올리브영만 보면 그럴듯한 문장은 많은데 몇 명 얘기인지 모른다. 화해만 보면 인공향 81건이라는 숫자는 있는데 어떤 향인지 모른다. 둘을 겹쳐야 그 81건이 무슨 얘기인지 나온다. 바비인형 냄새고, 원인은 착향제 7종이다. 아래 축 여섯 개도 전부 이렇게 겹쳐서 봤다.

축 1. 다 합쳐 세면 그 회사 광고 문구가 나온다

화해에서 모찌 토너 리뷰 1만 9천 건을 태그로 세면 1등이 "보습" 1,466건이다. 긍정 태그 3,821건 중 38퍼센트다. 2등은 "쫀득함", 3등은 "속건조 해결"이다. 화해 스킨/토너 카테고리에서도 보습 1위고, 토니모리가 상세 페이지에 내세운 축도 보습, 수분, 각질이다. 셋이 똑같다. 당연하다. 잘 팔리는 제품은 광고가 약속한 걸 지켜서 잘 팔린다.

이 숫자를 회의에 들고 가면 "그래서요"가 나온다. 맞는 반응이다. 경쟁사가 잘하는 걸 확인하려고 리뷰를 보는 건 아니니까. 근데 이 축을 빼면 안 된다. 여기서 못 이기면 시작을 못 한다. 보습은 우리가 차별화할 축이 아니고 최소한 따라가야 할 기준선이다. 그것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여기서부터는 리뷰를 갈라서 센다.

축 2. 재구매만 떼어 보면 사는 이유가 달라진다

재구매 락인 분석과 장기 효능 검증 페이지
재구매 45건과 한 달 사용 89건을 전체 596건에서 떼어 비교했다

올리브영 리뷰에는 재구매 표시가 붙는다. 그 리뷰만 떼서 전체와 비교했다. 수분감을 말한 비율이 재구매 리뷰는 42.2퍼센트, 전체는 35.8퍼센트다. "화장 잘 먹는다"는 26.7퍼센트 대 15.4퍼센트로 11포인트 벌어진다.

첫 구매 리뷰에는 "대용량", "기획 세트 혜자", "가성비"가 많다. 재구매 리뷰에서는 "N통째", "속건조", "화장 전에 바른다"가 올라온다. 가격 보고 들어왔다가 성능 보고 남는 거다. 이 제품이 잘 팔리는 이유는 두 개고 그 둘 사이엔 순서가 있다.

기획에선 이게 바로 결정으로 이어진다. 첫 구매는 용량과 가격이 만든다. 광고는 거기에 건다. 재구매는 속건조가 만드니까 제품이 그걸 지켜야 한다. 거꾸로 하면 광고비는 나가는데 두 번째 병이 안 팔린다.

축 3. 저평점만 떼면 그 회사가 저지른 일이 보인다

전체 평점이 4.8이면 불만이 없어 보인다. 근데 3점 이하만 모아 보면 딴 제품 얘기처럼 읽힌다. 모찌 토너 저평점 리뷰는 향 얘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바비인형, 플라스틱, 먼지, 인공적인 냄새. 거의 전부 "리뉴얼"이라는 단어가 같이 붙어 나온다.

리뉴얼 왜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리뉴얼되고 색이 묘하게 반투명해졌고 기름져진 느낌

예전 디자인 때 저 토너 썼었는데 그땐 되게 좋다고 느꼈는데 지금 건 속건조를 채워주는 느낌이 적어진 거 같아요

화해 아쉬워요 태그에서도 "인공향"이 81건으로 상위권이다. 두 채널이 같은 얘기를 한다. 토니모리가 잘 팔리는 제품을 리뉴얼하면서 향을 바꿨고 기존 고객이 그걸 싫어한다. 이건 저평점만 따로 세야 보인다. 전체에 섞으면 0.6퍼센트라 묻힌다. 근데 다음 제품을 기획하는 사람한테는 이 0.6퍼센트가 제일 중요한 숫자다. 경쟁사가 방금 비워 둔 틈이니까.

축 4. 성분표가 리뷰를 설명한다

성분 교차검증 페이지. 전성분 34개, 20가지 주의성분 Free, 알레르기 주의 2종, 리뷰 불만과 성분표 원인 대조
왼쪽은 리뷰에 나온 불만, 오른쪽은 성분표에서 찾은 원인

이번에 새로 넣은 축이 이거다. 리뷰만 보면 "향이 싫다"에서 멈춘다. 근데 화해에는 전성분이 올라와 있다. 34개를 하나씩 봤다.

일단 깨끗하다. 20가지 주의성분이 하나도 없고 위험도 높음으로 분류된 성분도 0개다. 성분 따지는 사람들 기준으로는 통과한 처방이다. 근데 착향제 계열이 7종 들어 있다. 라벤더오일, 레몬껍질오일, 제라늄꽃오일, 주니퍼오일, 라반딘오일, 그리고 알레르기 주의성분으로 따로 표시되는 리모넨과 리날룰. 라벤더오일과 레몬껍질오일엔 민감성 피부에 아쉽다는 비고까지 붙어 있다.

인공향 81건은 취향 문제가 아니었던 거다. 성분표에 미리 적혀 있었다. 저평점 리뷰 중에 "향료 성분이 많아서 저한테는 안 맞는다"고 정확히 짚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말이 맞았다. 리뷰 1만 9천 건과 성분표 34줄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기획에서 내릴 결정이 여기서 두 개 나온다.

하나. 토니모리는 이 향을 못 뺀다. 기존 팬이 좋아하는 향인 데다 리뉴얼로 한 번 바꿨다가 이미 데였다. 경쟁사가 못 고치는 약점이면 우리가 노릴 틈이다. 무향이나 저향으로 들어가면 인공향이 싫다는 81명이 그대로 우리 수요가 된다.

또 하나. 보습 목적 성분이 13종이다. 축 1에서 말한 기준선을 맞추려면 처방을 어디까지 채워야 할지 여기서 감이 온다. 경쟁사가 원가를 어디에 썼는지도 성분표에 같이 드러난다.

축 5. 한 달 쓴 사람만 떼어 보면 자극의 원인이 갈린다

올리브영에는 한 달 이상 썼다는 표시도 붙는다. 그 리뷰 89건만 보면 "순하다", "자극 없다"가 10퍼센트로 오히려 늘어난다. 온 가족이 쓴다, N통째 비우고 있다, 트러블 안 났다 같은 말이 나온다.

자극 불만의 원인은 제형이 아니고 향이다. 오래 쓴 사람은 순하다는데 방금 산 사람이 따갑다고 하면 피부보다 코가 먼저 반응한 거다. 축 4에서 성분표가 한 얘기와 똑같다. 두 데이터가 같은 곳을 가리키면 처방 문제고, 다른 곳을 가리키면 사용감 문제다.

이걸 왜 갈라야 하냐. 제형을 손대는 것과 향을 바꾸는 건 개발 비용이 아예 다르다. 제형은 처방을 다시 짜야 하고 향은 향료 하나 빼면 끝난다. 리뷰를 한 덩어리로 보면 "자극 불만 있음"에서 끝나고, 그러면 개발팀은 제형부터 본다. 갈라서 봐야 향이라는 게 나온다. 축 하나로 개발 항목 하나가 바뀐다.

축 6. 채널마다 불만이 다른 곳을 가리킨다

같은 제품인데 두 채널의 불만 1등이 다르다. 올리브영은 "건조함"과 "흘러내림"이 위에 있다. 화해에서는 "유분감" 147건, "산뜻하지 않음" 134건이 위로 올라온다. 올리브영은 대중몰이라 리뷰 쓰는 사람들이 사용감에 반응한다. 화해에 리뷰 쓰는 사람들은 애초에 성분을 따지고 들어오니 처방을 본다.

이게 갈리면 일을 누가 받을지가 정해진다. 화해에서 깎이면 원료나 처방 문제라 개발팀으로 간다. 올리브영에서 깎이면 사용감이나 기대치 문제라 브랜드팀으로 온다. 유분감 147건은 인공향 다음가는 빈틈이다. 보습 1위 제품이 무겁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가벼운 보습을 찾는 수요는 아직 아무도 못 채운 거다.

표본 수는 표지에 박는다

앞에서 본 표지가 그렇게 생긴 데는 이유가 있다. 리포트를 만들 때 표본 수부터 넣었다. "한 명 얘기잖아요"를 표지에서 막으려고. 1만 9천 건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 말은 안 나온다. 다음 장에는 뭘 봤고 뭘 못 봤는지를 적었다. 판매량이나 구매자 나이는 리뷰로 추정한 값이라 단정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못 박아둔다.

데이터와 방법론 페이지. 채널별 표본, 전성분 34개, 분석 축, 한계 명시
뭘 봤고 뭘 못 봤는지를 결론보다 먼저 보여준다

리뷰 분석이 회의에서 밀리는 건 틀려서가 아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라서 밀린다. 범위를 먼저 그어주면 그 안에서는 안 밀린다.

미충족 니즈와 액션 제언 페이지. 우선순위, 근거, 기대효과 표
제언마다 근거 수치와 기대 효과를 붙였다

마지막 장은 뭘 할지다. 1순위는 인공향 없는 포지션, 2순위는 가벼운 보습이고 보습 기본기는 경쟁 제품만큼은 맞춘다. 제언마다 근거와 기대 효과를 같이 붙이고 우선순위도 매긴다. 키워드 순위표에서 끝나는 리뷰 분석을 많이 봤는데 그런 건 읽고 나서 할 게 없다.

여섯 단계를 헤르메스에 그대로 옮겼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문제가 하나 보였다. 이걸 다 해도 결국 제품 하나 본 거다. 경쟁 제품은 보통 다섯 개쯤 되고 기획은 계속 돈다. 세는 순서는 제품이 바뀌어도 똑같다. 올리브영 열고, 화해 열고, 재구매 떼고, 한 달 사용 떼고, 저평점 떼고, 성분표 읽고, 표로 옮기고.

순서가 같으면 시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내 컴퓨터에서 돌렸다. 검은 화면에 명령어 한 줄 치면 리포트가 나오는 식이다. 잘 돌아갔다. 1만 9천 건을 손으로 읽는 건 어차피 못 할 일이었으니 이것만 해도 어디냐 싶었다.

두 번째 제품을 돌리다가 알았다. 리포트는 나오는데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나만 보는 데이터는 없는 거나 같다

제품개발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개발팀, 브랜드팀, 영업까지 같은 제품을 놓고 얘기한다. 근데 경쟁사 리뷰 데이터는 내 컴퓨터 검은 화면 안에만 있었다.

그러면 그 데이터는 내가 회의에서 꺼내는 만큼만 존재한다. 내가 안 뽑으면 아무도 못 본다. 내가 안 세는 축은 끝까지 아무도 안 센다. 개발팀이 "이 성분 반응이 실제로 어떤데요"가 궁금해도 나한테 부탁해야 하고, 부탁하기 애매하면 그냥 안 본다.

이런 걸 데이터 사일로라고 부른다. 데이터가 없어서가 아니라 한 사람한테만 쌓여서 생기는 문제다. 내가 리포트를 잘 뽑을수록 사일로는 더 단단해진다. 나만 뽑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내가 리포트를 잘 뽑는 대신 제품개발에 참여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직접 물어볼 수 있게 하기로 했다.

팀즈에 붙이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헤르메스가 안내하는 메신저 목록 앞쪽에 팀즈가 없었다. 뒤쪽에 있는 걸 못 보고 며칠 헤맸다. 회사 메신저는 개인 계정처럼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관리자 승인도 받아야 했다. 이 과정은 길어서 여기선 접는다.

지금은 팀즈 대화창에 제품 이름과 "리뷰 분석"을 보내면 78초 뒤 12페이지 PDF 링크가 온다. 위에 쓴 축 여섯 개를 다 돈 리포트다. 제품명이 애매해서 후보가 여러 개 잡히면 아무거나 고르지 않고 되묻는다.

팀 사람들은 이 과정을 하나도 몰라도 된다. 평소 열어두는 대화창에 물어보면 답이 온다. 처음부터 원한 게 이거였다.

통째로 맡겼더니 숫자를 지어냈다

근데 처음부터 이렇게 나온 건 아니다. 맨 처음엔 리뷰 데이터랑 위에 쓴 기준을 주고 리포트를 통째로 맡겼다. 알아서 잘하겠지 했다. 요즘 AI가 그런 거 아닌가.

모델이 자유 생성한 리포트에 들어 있던 경쟁 토너 비교표.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셋 다 내가 준 적 없는 데이터다

저 표가 나왔다.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나는 경쟁사 데이터를 준 적이 없다. 심지어 "화해 1,000건 랜덤 샘플"이라고 표본까지 밝히고 빈도를 막대로 그려놨는데 그 표본도 없는 거였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좋았다. 경쟁사 비교까지 해주네 싶었다. 30초쯤 지나서 이상했다. 내가 준 적이 없는데.

숫자를 지어낸 것보다 근거를 밝힌 척한 게 더 곤란하다. 형식이 갖춰져 있으면 검증할 생각이 안 든다. 이게 회의에 들어갔으면 아무도 못 잡았을 거다. 표가 너무 멀쩡하니까. 나중에 누가 출처를 묻는 순간 한 명 얘기만도 못한 게 된다. 이번엔 인용할 사람조차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문장만 맡긴다. 세는 건 코드가 한다. 축은 내가 정하고 모델은 정해진 칸에 문장만 쓴다. 위에 쓴 축 여섯 개가 그 칸이다. 알아서 리포트를 짜는 쪽이 데모로는 훨씬 잘 먹히는데 이건 기획 회의에 들어갈 문서다.

복제는 일을 통째로 넘기는 게 아니었다. 내가 뭘 보는지 먼저 정해두고 모델을 그 칸에 앉히는 거였다. 축을 안 적어뒀으면 저 표를 걸러낼 기준도 없었다.

지금

요즘 제품개발 미팅 테이블에는 경쟁사 토너 옆에 리포트 12페이지가 같이 올라간다. 손등에 발라보는 건 그대로 한다. 근데 "향 좋네요" 다음에 "인공향 81건이요"가 나온다. 발라보는 사람은 여전히 회의실에 앉은 우리뿐이다. 근데 이제 그 옆에 1만 9천 명이 남긴 숫자가 같이 놓인다.

경쟁 제품 다섯 개를 돌려도 이제 오전을 다 안 쓴다. 남는 시간엔 세는 대신 축을 고친다. 다음에 넣을 축은 리뉴얼 전후 비교다. 저 바비인형 리뷰가 언제부터 나왔는지 날짜로 자르면 토니모리가 향을 바꾼 달이 나올 거다.

리뷰 리포트가 돌아가니까 재고와 광고 성과도 같은 방식으로 붙였다. 이제 재고를 물어보는 사람, 광고 성과를 물어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것도 원래는 사일로였던 거다.

헤르메스를 팀즈에 붙이는 과정은 위에서 접은 얘기가 훨씬 많아서 따로 한 편이 나올 것 같다. 구축하는 법이 궁금하신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