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품개발 미팅 테이블에 경쟁사 토너가 세 개 올라와 있었다. 다들 손등에 발라봤다. "쫀득하네요." "향 좋네요." "이거 올영에서 요즘 제일 나가요." 20분 뒤에 우리 신제품 방향이 정해졌다.

그 토너를 사서 쓴 사람은 1만 9천 명이다. 그중 한 명이 올리브영에 이렇게 써놨다.

향.. 무슨 일이죠. 원래 상큼했던 향이 무슨 바비인형 플라스틱 머리 냄새로 바꼈네요. 괜히 샀음.. 왜 잘 팔리면 리뉴얼들을 해댈까요. 토니모리가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갈랐네..

다른 리뷰에는 "주차장에 오래 냅둔 바비인형 냄새"라고 적혀 있다. 그 아래 누가 "이건 좋게 말해준 거고 오래 묵힌 먼지 냄새"라고 받아쳤다. 나는 토니모리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근데 이 회사가 리뉴얼하면서 향을 바꿨다는 걸 안다. 그게 잘 안 됐다는 것도 안다. 리뷰 1만 9천 건이 알려줬다.

그리고 그 향이 뭔지도 안다. 화해 성분표에 적혀 있다. 착향제 계열 7종, 그중 알레르기 주의성분 2종. 리뷰는 결과고 성분표는 원인이다. 둘을 겹치면 저 1점 리뷰가 취향이 아니라 처방이라는 게 나온다.

회의실에서 우리는 품평을 했다. 손등에 바르고 향 맡고 20분이면 끝났다. 그 제품을 산 사람들은 리뷰를 남겼다. 몇 달 쓰고 올리브영에 적은 게 1만 9천 건이다.

우리는 "향 좋네요"라고 했고 그중 81명은 "인공향"이라고 썼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근데 그날 방향은 손등만 보고 정했다. 인공향이라는 말은 원래 토니모리 개발팀 회의에서 나왔어야 한다. 그게 올리브영 리뷰창에 적혀 있다. 토니모리도 못 읽는다. 1만 9천 건이니까. 하루에 100건씩 읽어도 반년이다.

테이블에 제품은 있는데 고객이 없다

제조업 기반 뷰티 회사에서 브랜드사업부를 맡고 있다. 마케터 8년차이고 최근에는 제품개발 기획까지 하게 됐다. 그 미팅에 들어가 보면 순서가 늘 같다. 벤치마크 제품을 고르고, 발라보고, 성분표 보고, 단가 맞추고. 개발팀은 처방을 본다. 이 성분이 이 농도에서 효과가 있다는 논문 근거를 붙여서 검토한다. 브랜드팀 쪽은 소구다. 소구 포인트를 어떻게 더 뾰족하게 세울지를 붙잡고 있다. 둘 다 자기 자리에서 제대로 하는 얘기다. 근데 그 사이에 하나가 빠져 있다. 그 제품을 이미 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안 본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도 신제품 얘기가 나오면 경쟁 제품 리뷰부터 판다. 문제는 그게 회의까지 살아서 못 온다는 거다. 1만 9천 건 중에 몇백 건 읽고 나머지는 못 본 척했으니까. 그러고 인상 몇 개랑 인용 몇 줄을 들고 회의에 들어갔다. 위에 있는 저 바비인형 리뷰가 딱 그런 거다. 재밌는데 회의에서는 아무 힘이 없다. "그거 한 명 얘기잖아요" 한마디면 끝난다. 솔직히 맞는 말이다. 한 명 얘기로 처방을 바꿀 순 없다.

그래서 이번엔 읽지 말고 세보기로 했다. 몇 명이 그러는지가 나와야 회의에서 안 밀리니까.

문제는 셀 게 1만 9천 건이라는 거였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나 말고 누가 하느냐. 사람을 붙여달라고 할 일은 아니고, 붙여도 이것만 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만들기로 했다. 정확히는 이 일을 할 때의 나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경쟁사 리뷰를 볼 때 내가 뭘 먼저 열고 무엇부터 세는지, 그 순서를 그대로 옮겨 담을 생각이었다.

도구를 하나 붙이는 것과는 다르다. 도구는 빠르기만 하면 되는데 이 일은 무엇을 세느냐가 전부다. 빨라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처럼 봐야 했다.

왜 하필 헤르메스였냐면

AI 에이전트를 하나 붙여야겠다는 생각은 작년부터 있었다. 매번 다음에 하자로 넘겼다.

올해 들어 그록 봇 얘기가 계속 보였다. 에이전트한테 클라우드 컴퓨터를 한 대씩 주고 노트북을 닫아놔도 알아서 일을 한다고 한다. 좌석당 월 120달러부터. 이 정도로 시끄러우면 미뤄둔 걸 꺼낼 때가 된 거다.

리뷰 분석 리포트 표지. 화해 19,019건, 올리브영 596건, 화해 스킨/토너 보습 1위
대화창에 제품 이름을 넣으면 오는 리포트. 표지부터 화해 19,019건, 올리브영 596건이 박혀 있다

찾아보기 전에 조건부터 적었다. 이건 나 혼자 쓰려고 만드는 게 아니니까.

하나, 결과가 팀 전체에 닿아야 한다. 나만 열 수 있으면 만들 이유가 없다. 둘, 아무도 새로 배우지 않아야 한다. 셋, 경쟁사 리뷰든 우리 판매 데이터든 회사 밖으로 안 나가야 한다. 넷, 사람 수만큼 돈이 붙으면 안 된다. 팀 전체가 쓰는데 좌석당 과금이면 쓰라고 못 한다.

이 네 개로 후보가 거의 다 걸러졌다.

화제가 된 상용 에이전트들은 죄다 슬랙에 붙는다. 우리 회사 메신저는 팀즈다. 사서 쓰는 길은 여기서 막혔다. 사내 대시보드를 하나 만드는 것도 생각했는데 이건 두 번째 조건에서 걸린다. 주소를 따로 알려줘야 하고 로그인도 한 번 더 한다. 두 번 안 열면 없는 도구다. 그런 걸 몇 번 봤다.

그러다 몇 달 전에 본 글이 생각났다. 오픈클로 정리하고 헤르메스로 갈아탔다고, 게임체인저라고, 좋아요가 천 개 넘게 달려 있던 글이다. 그때는 오픈클로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다음 세대 얘기를 읽고 있는 게 웃겨서 넘겼는데 이번에 그 이름을 다시 꺼냈다.

헤르메스는 노우스 리서치에서 만든 오픈소스 AI 에이전트다. 챗봇이랑 뭐가 다르냐면, 말만 받아주는 게 아니라 시키면 실제로 일을 한다. 데이터를 직접 가져와서 세고 문서로 만들어 넘긴다.

네 조건에 다 맞았다. 오픈소스라 내 컴퓨터에서 돈다. 데이터가 밖으로 안 나간다. 회사에서 이미 쓰는 코파일럿 구독을 그대로 물릴 수 있어서 사람이 늘어도 돈이 안 붙는다. 무엇보다 따로 사이트를 만드는 게 아니라 메신저 안에 들어가 산다. 팀즈는 다들 어차피 하루 종일 켜놓으니까 거기 있으면 배울 게 없다. 그냥 말을 걸면 된다.

내가 그리던 그림은 이거였다. 제품 기획하다가 경쟁사가 궁금해진 사람이 팀즈 창에 제품 이름 하나를 던진다. 1분쯤 뒤에 리포트가 온다. 그 사람이 개발팀이든 브랜드팀이든 상관없이. 나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근데 그릇을 고른 게 절반이고 절반이 남았다. 담을 게 있어야 한다. 헤르메스는 시키는 걸 하지 뭘 셀지를 아는 놈이 아니다. 축이 틀리면 틀린 걸 빨리 가져온다.

그래서 옮길 것부터 적었다. 경쟁사 리뷰를 볼 때 내가 어떤 순서로 보는지를 글로 썼다. 쓰고 나서 알았는데 여섯 단계였다. 매번 감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순서가 있었다. 그 여섯 개를 차례로 적는다.

올리브영과 화해는 다른 데이터를 준다

축 얘기를 하기 전에 재료부터. 리뷰를 볼 데는 여러 군데지만 스킨케어는 이 두 곳이면 대부분 커버된다. 올리브영은 실제로 돈 내고 산 사람만 리뷰를 쓸 수 있는 유통 채널이고, 화해는 성분을 따져 보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앱이다. 사는 곳이 다르니 쓰는 사람도 다르다. 그래서 같은 제품인데 나오는 데이터가 아예 딴판이다.

올리브영에서는 문장이 나온다. 596명이 자기 말로 쓴 리뷰다. 재구매인지, 한 달 넘게 썼는지도 표시가 붙는다. 사람 수는 적은데 왜 그랬는지가 적혀 있다. 화해는 다르다. 읽을 문장은 거의 없고 숫자가 쌓여 있다. 1만 9천 명이 고른 좋아요·아쉬워요 태그, 카테고리 안에서 몇 등인지, 전성분 34개가 각각 뭔지. 몇 명이 그러는지가 여기선 숫자로 붙는다. 처방도 여기 있다.

하나만 보면 반쪽이다. 올리브영만 보면 그럴듯한 문장은 많은데 몇 명 얘기인지 모른다. 화해만 보면 인공향 81건이라는 숫자는 있는데 그게 어떤 향인지 모른다. 겹쳐야 그 81건이 뭘 말하는지 나온다. 그게 바비인형 냄새고, 원인은 착향제 7종이다. 밑에 나오는 축 여섯 개가 전부 이 겹치기다.

축 1. 다 합쳐서 세면 그 회사 광고랑 같은 말이 나온다

화해에서 모찌 토너 리뷰 1만 9천 건을 태그로 세면 1등이 "보습" 1,466건이다. 긍정 태그 3,821건 중 38퍼센트다. 2등 "쫀득함", 3등 "속건조 해결". 화해 스킨/토너 카테고리에서 보습 1위, 토니모리가 상세 페이지에 내세운 축도 보습, 수분, 각질. 셋이 똑같다. 당연하다. 잘 팔리는 제품은 광고가 약속한 걸 지키니까 잘 팔리는 거다.

이 숫자를 회의에 들고 가면 "그래서요"가 나온다. 맞는 반응이다. 경쟁사가 잘하는 걸 확인하러 리뷰를 보는 게 아니다. 근데 이 축을 빼면 안 된다. 여기서 못 이기면 시작을 못 하니까. 보습은 우리가 차별화할 축이 아니라 최소한 따라가야 할 기준선이다. 그것만 확인하고 넘어간다. 리뷰를 다 합쳐서 세면 결국 그 회사가 상세 페이지에 써놓은 말이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 갈라야 한다.

축 2. 재구매만 떼면 사는 이유가 바뀐다

재구매 락인 분석과 장기 효능 검증 페이지
재구매 45건과 한 달 사용 89건을 전체 596건과 갈라서 비교한다

올리브영 리뷰에는 재구매 표시가 붙는다. 그것만 따로 떼서 전체와 비교했다. 재구매한 사람은 42.2퍼센트가 수분감을 말하고 전체는 35.8퍼센트다. "화장 잘 먹는다"는 26.7퍼센트 대 15.4퍼센트로 11포인트 벌어진다.

첫 구매 리뷰에는 "대용량", "기획 세트 혜자", "가성비"가 많다. 재구매 리뷰에는 "N통째", "속건조", "화장 전에 바른다"가 올라온다. 가격 보고 들어와서 성능 보고 남는 구조다. 이 제품이 잘 팔리는 이유는 둘이다. 순서도 있다.

기획에서는 이게 그대로 결정이 된다. 첫 구매를 만드는 건 용량과 가격이다. 광고는 거기 건다. 재구매를 만드는 건 속건조니까 제품이 그걸 지켜야 한다. 반대로 하면 광고비는 나가는데 두 번째 병이 안 팔린다.

축 3. 저평점만 떼면 그 회사가 저지른 일이 나온다

전체 평점이 4.8이면 불만이 없어 보인다. 근데 3점 이하만 따로 모으면 다른 제품이 나온다. 모찌 토너 저평점 리뷰는 향 얘기가 압도적이다. 바비인형, 플라스틱, 먼지, 인공적인 냄새. 그리고 거의 전부 "리뉴얼"이라는 단어가 같이 나온다.

리뉴얼 왜 하신 건지 모르겠어요. 리뉴얼되고 색이 묘하게 반투명해졌고 기름져진 느낌

예전 디자인 때 저 토너 썼었는데 그땐 되게 좋다고 느꼈는데 지금 건 속건조를 채워주는 느낌이 적어진 거 같아요

화해 쪽 아쉬워요 태그에서도 "인공향"이 81건으로 위에 있다. 두 채널이 같은 얘기를 한다. 토니모리는 잘 팔리는 제품을 리뉴얼하면서 향을 바꿨고 기존 고객이 그걸 싫어한다. 저평점만 따로 세야 이게 보인다. 전체에 섞어놓으면 0.6퍼센트라 안 보인다. 근데 다음 제품을 기획하는 사람한테는 이 0.6퍼센트가 제일 중요한 숫자다. 경쟁사가 방금 비운 자리니까.

축 4. 성분표가 리뷰를 설명한다

성분 교차검증 페이지. 전성분 34개, 20가지 주의성분 Free, 알레르기 주의 2종, 리뷰 불만과 성분표 원인 대조
왼쪽은 리뷰가 말하는 불만, 오른쪽은 성분표가 답하는 원인

여기가 이번에 새로 넣은 축이다. 리뷰만 보면 "향이 싫다"에서 끝난다. 근데 화해에는 전성분이 있다. 34개를 하나씩 봤다.

일단 깨끗하다. 20가지 주의성분이 하나도 없고 위험도 높음으로 분류된 성분이 0개다. 성분 따지는 사람들 기준으로 통과된 처방이다. 근데 착향제 계열이 7종이다. 라벤더오일, 레몬껍질오일, 제라늄꽃오일, 주니퍼오일, 라반딘오일, 그리고 알레르기 주의성분으로 따로 표시되는 리모넨과 리날룰. 라벤더오일과 레몬껍질오일은 민감성 피부에 아쉽다는 비고까지 달려 있다.

그러니까 인공향 81건은 취향 문제가 아니다. 성분표에 미리 적혀 있었다. 저평점 리뷰 중에 "향료 성분이 많아서 저한테는 안 맞는다"고 정확히 짚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 말이 맞았다. 리뷰 1만 9천 건과 성분표 34줄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여기서 기획 결정이 두 개 나온다.

하나. 토니모리는 이 향을 못 뺀다. 기존 팬이 좋아하는 향인 데다 리뉴얼로 한 번 바꿨다가 이미 데였다. 경쟁사가 못 고치는 약점이면 그게 우리 자리다. 무향이나 저향으로 들어가면 인공향 싫다는 81명이 그대로 우리 쪽 수요가 된다.

또 하나. 보습 목적 성분이 13종이다. 축 1에서 말한 기준선을 맞추려면 처방을 어디까지 채워야 하는지 여기서 감이 온다. 성분표를 보면 경쟁사가 원가를 어디에 썼는지도 같이 보인다.

축 5. 한 달 쓴 사람만 떼면 원인이 갈린다

올리브영에는 한 달 이상 썼다는 표시도 있다. 그 리뷰 89건만 보면 "순하다", "자극 없다"가 10퍼센트로 오히려 늘어난다. 온 가족이 쓴다, N통째 비우고 있다, 트러블 안 났다.

그러니까 자극 불만은 제형 문제가 아니다. 향이다. 오래 쓴 사람은 순하다고 하는데 방금 산 사람은 따갑다고 하면, 피부가 아니라 코가 먼저 반응한 거다. 축 4에서 성분표가 한 얘기랑 똑같다. 두 데이터가 같은 곳을 가리키면 처방 문제, 다른 곳을 가리키면 사용감 문제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하냐. 제형을 손대는 거랑 향을 바꾸는 건 개발 비용이 아예 다르다. 하나는 처방을 다시 짜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향료 하나 빼면 된다. 리뷰를 한 덩어리로 보면 "자극 불만 있음"으로 끝나고 그러면 개발팀은 제형부터 본다. 갈라서 보면 향이라는 게 나온다. 축 하나가 개발 항목 하나를 바꾼다.

축 6. 채널마다 불만이 다른 곳을 가리킨다

같은 제품인데 두 채널의 불만 1등이 다르다. 올리브영은 "건조함"과 "흘러내림"이 위에 있다. 화해에서는 "유분감" 147건, "산뜻하지 않음" 134건이 위로 올라온다. 올리브영은 대중몰이라 쓰는 느낌에 반응한다. 화해에 리뷰 쓰는 사람들은 애초에 성분을 따지고 들어온다. 그러니 처방을 본다.

이게 갈리면 일이 어디로 가는지가 정해진다. 화해에서 깎이면 원료나 처방 문제라 개발팀으로 가고 올리브영에서 깎이면 사용감이나 기대치 문제라 브랜드팀으로 온다. 그리고 유분감 147건은 인공향 다음가는 빈틈이다. 보습 1위 제품이 무겁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가벼운 보습이라는 자리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표지에 표본 수부터

앞에서 본 표지가 그렇게 생긴 이유가 있다. 리포트를 만들 때 표본 수부터 박았다. "한 명 얘기잖아요"를 표지에서 막으려고. 1만 9천 건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 말은 안 나온다. 그다음 장은 뭘 봤고 뭘 못 봤는지다. 판매량이나 구매자 나이는 리뷰로 추정한 값이라 단정하지 않는다고 여기서 못 박아둔다.

데이터와 방법론 페이지. 채널별 표본, 전성분 34개, 분석 축, 한계 명시
무엇을 봤고 무엇을 못 봤는지를 결론보다 앞에 둔다

리뷰 분석이 회의에서 밀릴 때는 틀려서 밀리는 게 아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몰라서 밀린다. 범위를 먼저 그어주면 그 안에서는 안 밀린다.

미충족 니즈와 액션 제언 페이지. 우선순위, 근거, 기대효과 표
제언마다 근거 수치와 기대 효과를 붙인다

마지막 장은 뭘 할지다. 1순위 인공향 없는 포지션, 2순위 가벼운 보습, 그리고 보습 기본기는 최소 동등. 근거가 뭔지, 뭘 기대할 수 있는지를 같이 붙인다. 우선순위도 매긴다. 키워드 순위표에서 끝나는 리뷰 분석을 많이 봤는데 그건 읽고 나서 할 게 없다.

여섯 단계를 그대로 옮겼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이걸 제품 하나에 다 하고 나면 딱 제품 하나 본 게 된다. 경쟁 제품은 보통 다섯 개쯤 되고, 기획은 계속 돈다. 그리고 세는 순서는 제품이 바뀌어도 똑같다. 올리브영 열고, 화해 열고, 재구매 떼고, 한 달 사용 떼고, 저평점 떼고, 성분표 읽고, 표로 옮기고.

순서가 같으면 시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처음엔 내 컴퓨터에서 돌렸다. 검은 화면에 명령어 한 줄 치면 리포트가 나오는 방식이다. 잘 됐다. 1만 9천 건을 손으로 읽는 건 어차피 안 되는 일이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어디냐 싶었다.

두 번째 제품을 돌리다가 알았다. 리포트는 나오는데, 그걸 볼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나만 보는 데이터는 없는 거나 같다

제품개발은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다. 개발팀은 처방을 보고 브랜드팀은 소구를 본다. 영업도 같은 제품을 놓고 얘기한다. 근데 경쟁사 리뷰 데이터는 내 컴퓨터 검은 화면 안에만 있다.

그러면 그 데이터는 내가 회의에서 말해주는 만큼만 존재한다. 내가 안 뽑으면 아무도 못 본다. 내가 안 세는 축은 영영 아무도 안 센다. 개발팀이 "이 성분 반응이 실제로 어떤데요"가 궁금해도 나한테 부탁해야 한다. 부탁하기 애매하면 그냥 안 본다.

이런 걸 데이터 사일로라고 부른다. 데이터가 없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한 사람한테만 쌓여서 생긴다. 리포트를 잘 뽑을수록 사일로는 더 단단해진다. 나만 뽑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내가 리포트를 잘 뽑는 게 아니라 궁금한 사람이 직접 물어보게 하는 것. 제품개발에 참여하는 사람이면 아무나. 팀즈 대화창에 제품 이름 던지면 리포트가 오게.

팀즈에 붙이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헤르메스가 안내하는 메신저 목록에 팀즈가 앞쪽엔 없고 뒤쪽에 있었다. 없는 줄 알고 며칠 헤맸다. 회사 메신저는 개인 계정처럼 그냥 못 들어가서 관리자 승인도 받아야 했다. 이 얘기는 따로 한 편이 나올 만큼 길어서 여기선 접는다.

지금은 팀즈 대화창에 제품 이름하고 "리뷰 분석"이라고 보내면 78초 뒤에 12페이지 PDF 링크가 온다. 위에 쓴 축 여섯 개를 다 돈 리포트다. 제품명이 애매해서 후보가 여러 개 잡히면 아무거나 고르지 않고 되묻는다.

팀 사람들은 이걸 하나도 몰라도 된다. 평소 열어두는 대화창에 물어보면 답이 온다. 그게 목표였다.

통째로 맡겼더니 지어냈다

근데 처음부터 이렇게 나온 건 아니다. 맨 처음엔 리뷰 데이터랑 위에 쓴 기준을 주고 리포트를 통째로 맡겼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게 요즘 AI 아닌가.

모델이 자유 생성한 리포트에 들어 있던 경쟁 토너 비교표.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셋 다 준 적 없는 데이터다

저 표가 나왔다. 라운드랩, 이니스프리, 아벤느. 경쟁사 데이터를 준 적이 없다. 심지어 "화해 1,000건 랜덤 샘플"이라고 표본까지 밝히고 빈도를 막대로 그려놨는데 그 표본도 없는 거였다.

처음 봤을 때는 솔직히 좋았다. 경쟁사 비교까지 해주네. 한 30초쯤 뒤에 이상했다. 내가 준 적이 없는데.

숫자를 지어낸 것보다 근거를 밝힌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게 더 곤란하다. 형식이 갖춰져 있으니까 검증할 생각이 안 든다. 이게 회의에 들어갔으면 아무도 안 잡았을 거다. 표가 너무 멀쩡하니까. 그러고 나중에 누가 출처를 묻는 순간 한 명 얘기만도 못한 게 된다. 이번엔 인용할 사람조차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문장만 맡긴다. 세는 건 코드가 한다. 축은 내가 정하고 모델은 정해진 칸에 문장만 쓴다. 위에 쓴 축 여섯 개가 그 칸이다. 알아서 리포트를 짜는 쪽이 데모로는 훨씬 잘 팔리는데 이건 데모가 아니라 기획 회의에 들어가는 문서다.

복제한다는 게 이런 뜻이었다. 일을 통째로 넘기는 게 아니었다. 내가 뭘 보는지를 먼저 정해두고 그 자리에 앉히는 거였다. 축을 안 적어뒀으면 저 표를 걸러낼 기준도 없었다.

지금

요즘 제품개발 미팅 테이블에는 경쟁사 토너 옆에 12페이지가 같이 올라간다. 손등에 발라보는 건 여전히 한다. 근데 "향 좋네요" 다음에 "인공향 81건이요"가 나온다. 발라보는 사람은 여전히 회의실에 앉은 우리뿐이다. 근데 이제 그 옆에 1만 9천 명이 남긴 숫자가 같이 놓인다.

경쟁 제품을 다섯 개 돌리는 데 이제 오전이 안 걸린다. 남는 시간에 하는 일이 바뀌었다. 세는 게 아니라 축을 고치는 일이다. 다음에 넣을 축은 리뉴얼 전후 비교다. 저 바비인형 리뷰가 언제부터 나왔는지 날짜로 자르면 토니모리가 향을 바꾼 달이 나올 거다.

리뷰 리포트가 되니까 재고랑 광고 성과도 같은 방식으로 붙였다. 이제 재고 물어보는 사람, 광고 성과 물어보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것도 사일로였던 거다.

헤르메스를 팀즈에 붙이는 과정은 위에 접은 얘기가 훨씬 많아서 따로 한 편이 나올 것 같다. 구축하는 법이 궁금하신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답하겠습니다.